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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Apr 26. 2018

1-5. 적에서 아군으로

라마르크를 반대하던 라이엘에게서 다윈이 배운 것

다윈은 맬서스의 책을 비글호 탐험 이후에 접했는데 그보다 더 일찍 접한 책이 있다. 그 책이 다윈의 생각에 더욱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책을 쓴 사람이 바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이다. 그가 쓴 책은 『지질학 원리』. 본인 대신 비글호 승선자로 다윈을 추천한 헨슬로가 다윈에게 권한 책이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 내내 그 책을 끼고 다니며 열독했다.


재밌는 건 라이엘은 ‘동일과정설’을 주장한 학자이며, 『지질학 원리』는 동일과정설을 바탕으로 라마르크의 견해를 반박하는 책이다. 쉽게 말해 진화론에 반대되고 창조론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것. 동일과정설이란, 현재에 일어나는 자연 현상의 법칙이 과거에도 동일하다는 이론이다. 그 적용 대상은 지리나 기후 지층뿐 아니라 생명체까지 포함한다. 현재의 생물종 분포를 통해 과거 생명체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당시 지질학계에서는 격변설과 동일과정설이 쟁점이었다. 격변설은 현재 지구의 모습이 과거의 예상 못했던 여러 차례의 크나큰 격변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이론이다. 현대의 지질학계는 격변설이 대세다. 20세기에 일어난 화산폭발의 영향을 실제 여러 차례 겪기도 했고 생명체의 대량 멸종 또한 지구 역사를 통틀어 5번 겪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지층이 쌓이는 과정이 점진적인 퇴적이 아니라 기습적인 사건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도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어쨌거나 19세기를 휩쓸었던 동일과정설에서 다윈은 어떤 영향을 얻었을까. 그것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었다. 당시 일반 대중들은 지구의 나이를 6500년 정도로 생각했다. 성경의 영향 때문이다.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몇몇 사건과 시점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그 정도로 추론된다고 한다.


그런데 다윈의 생각처럼 원시생물이 진화하여 지금과 같은 생물종을 이루려면 6500년으로는 턱도 없었다. 다윈은 적어도 몇 십만 년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해줄 근거나 이론을 찾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라이엘의 책에서 옳다구나, 힌트를 얻은 것이다. 다윈의 추론은 거침없었다. 라이엘의 의견이 맞다면, 지금의 지층과 지질이 아주 오랜 세월에 걸친 점진적인 퇴적의 결과물이라면, 동식물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진행된 점진적인 변화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는 ‘적응’이었다. 라이엘은 모든 생명체는 그것이 서식하는 자연 환경에 최적화된 상태로 처음부터 태어났으며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다고 주장했다. 다윈은 이를 정반대로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적응됐던 게 아니라 적응에 최적화된 개체만 살아남은 거라고 말이다.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다윈은 생각했다.


더 재밌는 건 이후 라이엘이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고 그를 옹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기 훨씬 전에 책의 서론 격인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을 학계에 발표시킨 자가 라이엘이었고, 다윈의 이론을 지속적으로 연구·발전시키고 학계에 알리려고 노력한 자도 라이엘이었으며, 앨프리드 월리스가 아프리카 밀림에서 거의 완벽한 ‘자연선택설’을 담은 논문을 우편으로 부쳤을 때 다윈에게 빨리 책을 쓰도록 종용한 이도 라이엘이었다. 적군에서 완벽한 지원군이 된 사례다.


맬서스의 『인구론』도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도 현재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틀린 이론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다윈은 자신의 생각에 꼭 필요한 개념과 아이디어만을 영리하게 캐치해냈다. 그것이 또 다윈의 위대한 측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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