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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Apr 28. 2018

1-6. 알고 나면 빤한 이야기

본질이 먼저인가? 개체가 먼저인가?

다윈의 훌륭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후에 다윈의 사생팬이 되어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토머스 헉슬리(『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는 맨 처음 『종의 기원』을 읽고 이런 반응을 보였다. “이런 바보 같은! 나는 왜 그동안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단지 헉슬리만의 반응은 아니었다. 당대의 많은 생물학자들의 공통된 통한이었다.


대항해시대의 영향으로 이미 당대의 학자들은 세계 곳곳의 굉장히 많은 생물종의 데이터를 소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고 해석할 줄 몰랐던 것이다. 무엇이 그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을까. 크게 보면 창조론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창조론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든, 보다 근본적인 인식 체계가 서구인들의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본질론적 사고방식이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소크라테스다. 혹은 플라톤이다. 누구로 잡든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서양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후로 지금까지 그 어떤 학자도 완벽하게 풀지 못한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령,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 모든 인간을 다 알아야 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무수히 많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우주의 모든 인간을 다 아는 것, 이라고 정해 버리면 그것은 영원히 풀 수 없는 과제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답은 간단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은 저 세계(=이데아 세계)에 완벽한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태어나면서 망각하게 됐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적 추론을 통해 그것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 1+1=2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가? 세상 모든 개체를 하나씩 더해 본 후 내린 결론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합리적 추론을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 또한 마찬가지라는 거다.


그렇다면 현실의 인간들은 무엇인가? 그들은 이데아 세계의 본질적 인간의 개별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조금씩 다르고 또 불완전하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2000년 넘게 서양을 지배해 왔다. 게다가 기독교의 세계관과 친연성이 있다. 세상의 생명체를 이해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말 소 닭 개 등의 본질은 하나다. 그리고 그 본질에 따라 하나님이 개체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바로 창조론이다. 서양인들이 창조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세 마리의 말이 서로 다른 모습과 특징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각각의 말 개체들은 말의 본질을 복사한 순간적이고 불완전한 현상태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여담 한 가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본질에 따랐다면, 그 본질은 누가 만들었나, 하는 점이 토마스 아퀴나스 시절의 골치 아픈 난제였다. 답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본질도 하나님이 만들었거나, 또는 본질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그런데 둘 중 어느 것이 답이어도, 기독교의 세계관과 모순된다.


만약 하나님 스스로 본질을 만들고 그 본질에 어긋남 없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부자유한 존재가 되고 만다. 본질이 하나님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만들 수 없는 혹은 하나님의 능력에 속하지 않는 존재가 분명히 있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윌리엄 오컴이 해결하는데 아퀴나스가 영 못마땅한 사고방식을 통해서다. 그는 본질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개체를(앞으로 태어날 미래 세대 모두 포함) 직접 하나님이 손수 만들었다고 그는 사고의 방향을 정반대로 틀어버린다. 본질이라는 틀에 따라 공장식으로 찍어낸 게 아니라, 하나하나 손수 만들어낸 하나님의 핸드 메이드라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퀴나스의 고민은 아예 질문조차 성립되지 않는다.


오컴의 사고방식은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는 15세기 이후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돌아올 때마다 뱃사람들이 자꾸만 처음 보는 희귀한 생명체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말과 낙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라마와 야크는 전혀 처음 보는 동물이었다. 말 같기도 하고 낙타 같기도 하고 소 같기도 한 저 동물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의 특이 케이스인가? 아니면 낙타의 희귀 케이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애매한 개체들은 점점 늘어났다. 캥거루 타조 코알라 화식조 키위 등. 그것들은 기존의 생물 분류 체계에 잡히지 않았다.


19세기에 다윈과 다른 생물학자들의 차별성은 여기서 다시 발휘된다. 다윈은 본질적 사고를 뒤집었다. 본질이 먼저 있고 개체가 후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개체들이 먼저 존재하고 본질은 사후적으로 인간이 규정하는 것이라고 다윈은 생각했다. 가령 늑대라는 본질에 따라 개별적인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각 생명체의 습성과 형태에 따라 사람들이 정의하고 분류하는 것이라고 다윈은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15세기 이후 유럽에 쏟아져 들어온, 종의 경계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각 생물종은 칼로 두부 자르듯 완벽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종과 종은 연결되어 있다. 그 변화의 기로에 있는 기관과 조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다윈은 각 생명체를 종이라는 이름표에 가두지 않고 그것들의 특성을 그 자체로 보았다. 덕분에 그는 전혀 달라 보이는 생물종들 기관 사이의 유사성 또는 변화(=차이점)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생명체는 변화해 왔듯 앞으로도 생명체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향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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