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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y 01. 2018

1-7. 본능도 자연의 산물이다

안티-진화론자들을 위해 다윈이 마련한 선물 1

다윈의 영특함은 『종의 기원』 후반부에서 절정에 달한다. 다윈은 책의 후반부 절반을, 진화론에 대한 예상 반론과 그에 대한 재반론으로 채워 넣었다. 그는 지독히도 신중하고 영리했으며 자신의 생각에 확고했다. 지금도 그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책을 찾기 힘든데 하물며 160년 전의 책이라니. 다윈이 미리 제시한 안티-진화론자들(사실상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예상 반론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왜 이행적 변종을 볼 수 없는가 하는 점이다.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가 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했고 줄기에서 가지치기 하듯 변종된 거라면, 중간의 과도기적 형태를 지닌 종은 왜 보이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가령 어류가 진화하여 양서류가 된 거라면, 잉어와 개구리의 중간 형태들은 왜 하나도 없느냐 말이다. 조류에서 진화하여 포유류가 된 거라면 왜 과도기 종은 없는가.


이에 대해 다윈은 크게 두 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하나는 지질학적 이유 때문이다. A종과 B종이 현재 같은 지역에 살고 있고 둘의 형태가 유사해서 마치 B가 A에서 진화한 변종으로 보인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실은 A종과 B종은 과거 각기 다른 지역에 서식하며 완전히 다른 조상에서 진화한 무관한 변종이며, 현재는 지층의 이동으로 두 지역이 합쳐져 두 종이 공존하게 된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럴 듯하긴 하지만 모든 사례를 그렇게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지 이어서 다윈은 둘째 답변을 제시한다. 대부분의 과도기 종은 멸종했다는 것이다. 가령 어류가 최초에 진화했을 때는 완전한 양서류의 형태가 되지 못하고 어류와 양서류 과도기적 형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 생명체는 물속에서는 어류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고 물 바깥에서는 양서류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자연선택에 의해 현재는 어류와 양서류만 남는다. 조류와 포유류의 중간종 또한 마찬가지다. 날개도 앞발도 아닌 어중간한 기관을 가진 생물종의 장점이란 무엇일까. 가혹한 자연은 그것을 살려두지 않는다.


둘째 반론은 다음과 같다. 박쥐처럼 특이한 습성의 종이나, 눈처럼 고도로 복잡한 기관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가. 다른 쥐들은 그렇지 않은데 왜 유독 박쥐는 비행할 수 있는 막을 가지고 있으며 시력이 현저히 떨어지는데다 초음파를 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이 진화로 설명 가능한가. 눈은 어떤가. 눈의 생물학적 구조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게 발달할 수 있었을까.


박쥐가 왜 하필 그런 형질을 가지도록 진화했는지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당시에는 변이를 일으키는 요인이나 원인에 대해 1도 지식이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이유들로 변이가 발생하며, 해당 개체가 살아남아 번식한다면 그 변이가 다음 세대에 계속 전달될 수 있다고 다윈은 생각했다. 박쥐의 그러한 형질들이 왜 생긴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능력이 적어도 박쥐로 하여금 다른 설치류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게 만드는 건 확실하다.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다른 생물종은 거의 듣지 못하는 음역대를 감지한다는 것은 장점이면 장점이지 단점은 아니다.


눈의 진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쌓인 결과물이다. 태초의 생명체는 시각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알 수 없는 어떤 요인에 의해) 가시광선을 감지할 수 있는 세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무 능력이 없는 개체보다 빛의 유무라도 감지할 수 있는 개체가 더 유리하다. 그러다 빛의 유무에서 빛의 세기를 세심하게 감지하고, 형태를 감지라고 색채를 감지하는 시각 세포로 서서히 오랜 시간 발달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시간적으로 띄엄띄엄 아주 조금씩 새로운 형질이나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셋째 질문은 본능도 자연선택의 대상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벌집을 짓는다. 심지어 벌집은 인간이 학습해서 만든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다. 그러한 능력도 진화의 결과물인가.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능력은 어떤가. 개미의 사회성은 어떤가 말이다.


다윈은 이 대목에서 주춤한다. 당대의 지식으로는 무리였던 게다. 그래서일까. 그는 우회적인 답변으로 무마한다. 벌집을 자세히 보면 결코 정육각형이 아니며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며 상당히 조악하다고 말이다. 거미도 개미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멀리서 보면 훌륭해 보이지만 개체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비록 완벽한 답도 옳은 답도 아니지만, 다윈으로서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인식의 틀을 뒤집은 그러한 답변에서 다윈의 재치와 창의성을 또 한 번 느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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