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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23. 2018

아빠는 죄가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은밀하게 보여주는 진짜 폭력

*스포일 덩어리 글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본 후 포털에서 검색하니 온통 아버지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나는 놀랐다. 영화의 어디에서도 아버지인 앙투안 베송의 폭력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본 이들이 보인 반응의 이유는 짐작된다. 마지막 장면 때문일 것이다. 앙투안 베송이 사냥총을 들고 와 미리암의 집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장면. 하지만 그 장면에서 앙투안의 폭력을 보았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대로 영화를 보는 1차원적 관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의 첫 장면은 법정에서의 조정이다. 아들 줄리앙의 양육 문제를 둘러싸고 미리암과 앙투안이 법적 공방을 한다. 미리암은 앙투안이 줄리앙을 만나지 못하게 막으려 하고, 앙투안은 자신도 아버지이니 2주에 1번씩 줄리앙을 데리고 있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장면에서 느꼈던 주요 포인트는 우선, 미리암과 앙투안이 자신의 옳음을 각자의 변호사를 통해 판사에게 아무리 호소하여도 당최 그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둘 모두의 절박한 심정은 느껴지지만 사건의 전말은 알 길이 없다.


또 하나는, 둘의 개인사를 판사에게 설득해 권리를 얻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때의 판사란 해당직업을 가진 개인을 뜻하기보다 그에게 판사라는 직함과 권한을 준 상위의 주권자=국가 시스템을 뜻한다. 둘만 아는 사건을, 그 사건을 전혀 모르는 3자인 판사에게 호소하여 그의 동의와 판결을 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힘의 중심은 판사에게 있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나는 주변인 또는 객체가 되고 만다는 점에서 이는 문제적이다. 사건의 진실을 모르는 자가 그 진위를 아는 자들을 처벌하기에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마지막 하나는, 그 첫 씬이 관람객의 입장에서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법정 조정 장면 전체 시간 중 미리암이나 앙투안이(혹은 그들의 변호사가) 말하는 분량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 판사의 법적 진술과 판결이다. 무미건조한 판사의 법률적 대사는 나의 귀에 들어와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자꾸만 튕겨 나갔다. 그 대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법정에서의 절대 우위는 부부가 아니라 판사에게 있음을 표현하려 한 것일 테다.


이후 러닝 타임이 진행되어도 여전히 관람객은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다. 대체 미리암은 앙투안에게 어떤 일을 당한 걸까. 줄리앙은 왜 앙투안을 아빠라 부르지 않고 ‘그 사람’이라 부르며 아빠와 엄마의 만남을 방해하려 할까.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영화가 전개될수록 다만 알 수 있는 건 앙투안의 고립이다. 앙투안은 줄리앙의 거짓말을 계속 다그치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보다 못한 앙투안의 부모(=줄리앙의 조부모)는 결국 앙투안을 집에서 쫓아낸다. 갈 곳을 잃은 앙투안. 그가 결정한 최후로 돌아갈 곳은 역시 미리암의 집이다. 앞서 말한 대로 사냥총을 들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씬. 결국 경찰이 미리암의 집으로 출동해 앙투안은 경찰에 연행된다. 이 장면에서도 앙투안과 미리암은 여전히 첫 장면과 다를 바 없이 무력해 보인다. 앙투안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변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경찰에 끌려간다. 미리암은 겁에 질려 제대로 말 한 마디 못하고 벌벌 떨 뿐이다. 앙투안:미리암(과 줄리앙)=가해자:피해자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정말 영화를 통해 진실을 보았을까.


영화의 첫 장면을 지배하는 것이 판사의 판결이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경찰의 출동과 연행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유의미하다. 한 가족의 관계와 삶과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그들 가족 본인이 아니라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이라는 것.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가장의 폭력이 아닌, 개인의 무력함과 가해자로 내몰린 가장의 억울함을 보았다. 이대로 앙투안이 투옥되면 모든 사건이 해결될까.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 사실을 관객들이 볼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국가 또한 개인의 진실한 삶을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건 아닐까.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군림하려 하는 거라면?


미리암 가족의 안전과 평화는 이것으로 지켜지는 걸까. 그들에게 더 이상의 폭력은 없을까?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진정한 폭력은 사냥총으로 현관문을 부시고 들어오는 따위의 스케일이 아니다. 개인의 마음을 짓밟고, 인간관계에 개입해 자기중심적인 잣대를 들이밀며 한 사람을 범죄자로 규명하고, 끝내 그를 사회에서 배척하는 국가의 선택이야말로 국민의 삶 전체를 주무르는 거대한 폭력이다. 국가 시스템이 여전히 건재하는 한, 진짜 폭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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