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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Nov 08. 2018

그래도 장애는 안 돼!

- 영화 [청설]의 불편함


* 심각한 스포일러 有 *


세월의 더께 때문인지, 나는 프로불편러와는 거의 정반대인 아마추어편안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청설]은 두 번 봤지만 두 번 다 내게 일말의 불편함을 주었다.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결말 때문이다.


서로를 청각장애인으로 오해한 두 연인이 상대에게 장애가 없음을 알게 된다는 해피엔딩(?)은 관객에게 기묘한 안심을 준다. ‘청각장애를 극복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서 ‘비장애인의 오해 해프닝’으로 귀결되는 순간, 영화는 관객에게 ‘비장애인>장애인’이라는 등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게 된다. “역시 양양도 장애인이 아니었어!”라는 안도 혹은 다행.


겉보기에 영화는 샤오펑의 목소리를 통해 청각장애인의 자립성을 말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 또한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혜를 넘지 못한다. 그것은 4년 뒤 샤오펑이 다시 한 번 장애인 수영 대회에 나가는 장면으로 끝남으로써 확인된다.


샤오펑이 술 마시고 주정 부리는 씬과 조류 생태원에서 동생 양양의 사랑을 응원하는 씬 두 번에 걸쳐 장애인도 비장애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돈을 벌고 혼자 생활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영화는 막이 내릴 때까지 샤오펑이 혼자 무언가를 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못한다(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청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 4년 후 샤오펑이 다시 수영대회에 복귀하는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샤오펑의 진정한 자립이 될 수 없다. 그 대회는 4년에 1번뿐이며, 그동안 그 대회를 준비하느라 샤오펑은 양양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지 않았던가. 샤오펑은, 말로는 대회를 준비하며 청소부든 강사든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수화로 수영을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은 자신과 똑같은 청각장애인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세계는 장애인 사회를 넘어서 비장애인 사회까지 나아갈 수 없도록 이미 영화 안에서 판박여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보기에만 거창한 수영대회 복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온전히 혼자 지내는 샤오펑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수영대회에서마저도 샤오펑은 티앤커와 양양의 소리높은(?) 응원에 둘러싸인다. 정녕 그들(=티앤커와 양양)은 샤오펑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있는(hear me) 걸까.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장애인이 아니었다는 결말. 그리고 장애인을 장애인 전용 스포츠 대회 안으로 수용(또는 격리)할 수밖에 없는 영화 속 대안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보고(듣는 게 아니라) 대하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인 것만 같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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