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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Nov 17. 2018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난다?

영화 [베일리]의 반전 같은 사족

* 스포 有

반려견의 네 번의 생을 그린 영화 [베일리 어게인]. 영화의 세계관은 윤회를 따르며 육체와 영혼은 독립적이라고 전제한다. 주인공 개의 영혼이 태어났다 죽었다를 4번 반복. 영혼의 기억은 일정 부분 이어져 전생들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인간은 반려견을 선택하지만 개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 주인과 함께 살아야 한다. 때로는 버려져 도살장에 끌려가기도 하고, 유기견이 되거나, 혹독한 훈련을 거쳐 경찰견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개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선택이며 개는 주어진 상황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인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개는 매순간 만족스럽다는 듯 그려진다. 불행한 상황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않는 게 아니다) 늘 즐겁다고 느끼는 개의 내레이션을 들을 때면 역설적으로 더 슬프고 안타깝다. 이것은 감독과 작가의 영리한 연출의 몫.


허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디 개만 그러한가.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났고 국가 가족 성별 생김새 지역 유전자 등 사실상 현재의 나를 이루는 특성 중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충분히, 혹은 어느 정도, 현재에 만족하며 지금에 충실히 살아간다. 충성의 대표적 동물은 개라고 하지만, 인간 또한 그 못지않게 운명에 순종적이다. 견생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게 될 줄이야.


영화에서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것은 작위적인 감동을 주려는 연출인데, 주인공 개(=베일리)의 첫 번째 삶과 영화에서의 마지막 네 번째 삶이 이어진다는 설정이다. 첫 번째 삶에서 베일리의 반려인인 10살 남짓 꼬마가 50 중년이 되어 우연히 다시 베일리를 만나 함께 살아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존재를 깨닫고 감동적인 재회를 만끽한다는 결말인데, 이는 지나치게 의도적인 설정이라 외려 감동을 갉아먹는다.


개에게 주어진 4번의 삶을 제작진이 인위적으로 엮어버리니 오히려 관객 입장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4번의 삶을 옴니버스로 흩어놓기만 했다면, 관객들은 각자의 실로 베일리 삶의 결을 다양하게 엮었을 터이다. 제작진의 지나친 설정과 개입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억압한 꼴. 영화관을 나오며 더하기가 아닌 빼기의 미학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분명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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