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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Nov 29. 2018

가족의 탄생 아닌 가족의 해체

영화 [영주]에서 영주의 선택이 의미하는 것은

* 스포 有

‘자신을 아프게 만든 사람들마저도 사랑하는 포용’ 운운하는 영화 포스터는 사기였다. 영화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카피다. 자칫 영화를 오해하게 만들 우려마저 있다. 물론 그런 우려가 나쁘지는 않지만. 영화와 시놉시스가 따로 노는 또 다른 사례. 각설하고. 영화의 핵심은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영주]는 개인과 가족의 해체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절정, 영주의 대사에서 이 영화의 본격적인 고민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책임져 주지도 못한 채 먼저 죽어 버린 엄마 아빠가 뭐가 그리 대수냐는. 엄마 아빠가 못한 걸 대신해주는 아줌마 아저씨가 지금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소중하다는.


[영주]에서 유일하게 역동적인 인물은 오직 영주다(영화 제목일 정도이니 그 인물의 중요성은 더 말해 뭐하겠나).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동생 영인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고모와 고모부는 핏줄이란 이름으로 혹처럼 떠맡겨진 형제의 자식을 귀찮아하며 재산이나 뺏을 심산이고, 남동생은 부모님이 돌아간 지 5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방황 중이다.


가해자 가족인 상문과 향숙은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대신해 자식에게 못다 한 사랑을 영주에게 퍼붓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영주가 자신이 피해자의 딸임을 밝혔을 때 부부가 보인 당혹스러움과 절망감까지도 꽤나 전형적인 패턴이다. 허나 오직 영주만이 예상 밖의 행보를 걷고 또 달린다.


맨 처음 가해자 가족의 가게에 찾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내심 영주가 복수를 계획하거나 협박 또는 동정을 해서라도 그들에게 금품을 요구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일상에 끼어든다. 그리고 몰래 범죄를 감행한다. 예상 못한 일이 벌어져 비록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후 그녀는 더욱 가해자 가족의 삶에 녹아들었다. 동생한테 끔찍이도 자상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한 그영주 나중엔 동생보다 아줌마 아저씨를 더 좋아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유는 단연 하나다. 지금 이 순간 영주를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가 그 부부였기 때문이다. 아마 가해자 부부를 만나기 전까지 영주도 ‘죽은 부모님과 나=우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뭉치 남동생과 영악한 고모/고모부,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는 세상을 조금씩 견디면서 영주는 부모님과 자신 사이의 고리가 희미해져 감을 느꼈을 것이다. 혹은 본인이 조금씩 끊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과 자신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가해자 부부는 ‘우리’ 부모님을 해친 악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선인으로 입지가 180° 변한다. ‘가족’이 와해되는 순간이다. 그때까지도 영주를 제외한 영인과 상문, 향숙은 여전히 가족의 끈을 붙잡고 놓지 못한다. 영인은 엄마 아빠를 죽인 그들을 증오하며, 상문과 향숙은 식물인간이 된 아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라는 영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유일하게 ‘나’의 존재를 들이미는 인물, 그가 바로 영주다. 그러므로 관객이 영주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녀의 선택을 수긍할 때, 무의식적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개인을 옹호하게 된다. 아마 이 영화가 20년 전쯤에 나왔다면 지금처럼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냈을지 의문이다. 그런 면에서 [영주]는 현재 한국 사회의 어떤 단면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영주 상문 향숙의 결합을 ‘가족의 재탄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독이다. 우선 향숙은 아들의 방에서 기도를 올린 후 남편 상문에게, 이제 우리 어떡하냐며 영주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곤란함을 표출한다. 상문은 아무 말이 없지만 향숙과 비슷한 생각일 것으로 유추된다.


한편 영주는 이미 ‘우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는 유닛으로 살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녀의 그런 선택은 여전히 삐걱거리는 듯하다. 그것은 엔딩씬에서 드러난다. 영주가 앞으로도 계속 상문 향숙과 계속 관계를 이어서 살아갈지, 아니면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을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영주가 그들과 관계를 끊을지 이을지 여부가 아니다. 그러한 고민 자체가 우리 시대의 고민, 혹은 과도기로 보인다는 것이다. 가족과 개인 사이의 갈팡질팡. 핵가족과 비혼이 넘쳐나는 시대에.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1/4를 차지하는 사회에. 가족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할지 아직 명확히 정하지 못한 사회상을, 영화는 서울의 남과 북을 가르는 한강 위 다리를 통해 보여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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