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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19. 2018

내가 나를 말한다

영화 [그린 북]이 편견을 극복하는 방법

처음 만나는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의 출신 성분을 알아보는 것이다. 인종 국가 성별 거주지 경제력 등을 안다면 일단 대략적인 스캔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편견을 낳는다. 성급한 일반화이기 때문이다. 모든 흑인이 근육이 많아 힘이 세진 않듯, 모든 한국인이 수학을 잘하지 않듯 말이다.


나는 인간의 위와 같은 사고방식의 원인을 진화심리학적으로 생각해 왔었다. 뇌 용량은 제한적이다.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는 생존이다. 낯선 자를 만나면 그가 나를 해할 것인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인지 혹은 나와 무관한지 등을 순식간에 파악해야 한다. 낯선 상대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려면 각 카테고리별 정보를 대략적으로 저장해 두는 게 생존율을 높인다. 따라서 인간은 상대를 처음 만나면 그가 속한 출신을 먼저 따진다는 거다.


영화 [그린 북]을 보고 나는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인간의 편견은 단순히 생물학적 요인에만 기인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것 못지않게 사회적인 영향이 미치는 게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자본의 논리다. 물론 자본이 전면에 나서진 않는다. 자본은 상품과 문화를 앞세워 사람들을 소비자·타겟층이라는 명목으로 구분한다. 상류층/하류층, 뚱뚱한 자/마른 자, 10대/20대/30대/…, 지성 피부/건성 피부. 채식주의자/육식주의자, 흡연자/비흡연자 등등.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생래적으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은 기업에 의해서 사육된 측면이 더 크다. 영화에서 돈 셜리는 말한다. 자신은 무대에서는 출중한 피아니스트로 대접받지만 무대에 내려오는 순간 수많은 흑인 중 한 명이 되어 무시당한다고. 그것이 백인의 문화라고 말이다.


내가 이 대목에서 주목한 건, 어떤 사람들은 백인이 연주하는 클래식을 즐기지만 또 다른 이들은 흑인이 연주하는 클래식을 즐긴다는 점이었다. 자본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더 작은 덩어리로 구획짓는데, 단순히 취향의 차이가 계층의 차이가 되고 그것이 되물림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본의 순환을 더욱 촉진시킨다는 것이 핵심이다.


계층의 구분이든 인종의 구분이든 성별 구분이든 그것은 태생적으로 자본의 탄생과 유관하다. 단순히 기업의 상품 개발과 마케팅 차원의 논의가 아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특정 태그들을 항시 떠올리는 것은, 그것이 그 사람의 특성, 나아가 욕구와 관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그 믿음의 근원은 자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건 이 지점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이유가 생물학적 본성에 입각하든 사회적 학습에 의하든 그것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와 뇌를 거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차라리 중력을 무시하는 게 쉬울지도 모른다. 편견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계속 상대를 편견으로 대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있다. 나는 그것이 [그린 북]에서 눈여겨볼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은 자신의 주관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토니 발레롱가와 돈 셜리 둘 다 마찬가지다. 토니는, 발레롱가라는 성이 발음하기 어려우니 관객들에게 발리라고 소개하는 게 어떠냐는 돈의 제안을 처절하게 내리밟는다. 굳이 싫다는 돈에게 기어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이고 운전하면서 끊임없이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돈 셜리도 만만찮다. 기어이 훔친 옥석을 돌려주게 만들고(결국은 훔치는 데 성공했지만) 길에 버린 콜라 용기를 후진해서 줍게 만든다.


만약 두 사람이 자신의 고집을 꺾고 어느 정도 상대를 배려했다면 진실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피상적인 고용주와 고용자 혹은 뮤지션과 운전기사의 관계 정도? 피상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는 맺겠지만 인간적인 호감과 유대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백인남성이 아닌 토니 발레롱가임을, 흑인남성이 아닌 돈 셜리임을 서로에게 어필했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소통의 첫 단계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특정 카테고리로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 태도다. 남을 알기 전에 나를 알아야 한달까.


투어 중에 두 사람은 딱히 <그린 북>(=여행 지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1차적인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나를 규정하는 태그도 마찬가지다. 그 태그는 나를 이해시키는 최소한의 가이드일 뿐이지 나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지도가 장소를 100% 표시할 수 없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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