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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04. 2019

3-02. 왜 그 땅이 당신 것이란 말이죠?

소유권과 노동가치설

마르크스의 목적은 자본주의 분석이었다. 자본주의를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소유권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유권 얘기를 하려면 존 로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가진 물건은 왜 나의 것인가? 물론 지금 시대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내 돈을 주고 샀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보자. 애초에 왜 그 물건은 누군가의 것이었나?


다시 존 로크의 시대로 돌아가자. 그 시대에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 주요한 방법은 농업 또는 수공업이다. 사과가 내 것인 이유? 닭고기와 달걀과 치즈가 내 것인 이유? 그것은 내가 그것을 얻기 위해 육체적인 노력, 즉 노동을 그것들에게 가했기 때문이다. 산에 있는 사과나무가 자라든가 말든가 그냥 내버려두면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나무가 잘 자라도록 내가 정성껏 돌보았다면, 그 나무에서 딴 사과를 내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존 로크의 생각이었다. 내가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붙여서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책상은 내 것이라는 것.


그것은 단지 물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땅에도 해당한다. 아무 주인 없는 공터를 내가 개간하고 울타리를 세우면 그만큼의 땅은 내 것이 된다는 논리다. ‘소유’라는 인식이야 물론 선사시대부터 있었겠지만, 그러한 소유를 하나의 권리 개념으로 정당화하고 안착시킨 것은 존 로크의 업적이다.


이 생각을 아담 스미스 또한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는 노동을 가치의 개념까지 연장시킨다. 쉽게 말해 물품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소유가 정당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도 산에는 주인 없는 열매와 채소들이 알아서 자라고 있다. 깨끗한 물이 산 정상에서 흘러나올 것이며, 산 깊숙이 다이아몬드 원석이 박혀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다. 그것이 내 손에 온전한 형태로 주어지기까지, 쉽게 말해 사과나무 자체가 아니라 깨끗하게 수확된 사과가, 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라 깨끗하게 정화되어 물병에 담긴 물이, 다이아몬드 원석이 아니라 아름답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내 손에 오기까지는 당연히 누군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동 덕분에 자연물은 인간에게 가치를 띠게 된다. 이것을 ‘노동가치설’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과거에는 장인 1명이 자기 혼자 혹은 몇 명의 문하생의 도움으로 물건을 만들었다면, 매뉴팩처가 성행하면서부터 분업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아담 스미스는 자신의 책 『국부론』에서 머리핀 얘기를 언급하는데, 과거에는 머리핀 하나를 혼자서 다 만들었다면, 이제는 머리핀을 만들기 위해 십 수 명이 나눠 일한다. 철을 자르는 사람, 망치로 때려 펴는 사람, 철을 구부리는 사람, 날카롭게 깎는 사람 등등. 그렇게 되면 최종 결과물인 머리핀은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 물론 그들 각자의 노동이 1/n씩 들어갔으니 그만큼의 가치는 지니고 있음에도 여전히 특정인의 소유는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공장을 운영하는 공장주의 소유가 되고, 대신 공장주는 머리핀을 만드는 데 노동을 제공한 인부들에게 일정한 임금을 지급한다. 이때 중요한 건 임금, 즉 화폐는 노동이라는 가치를 응고시킨 하나의 대체물이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화폐는 인부가 제공한 노동량만큼의 가치를 띠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첫째, 각 인부들이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아담 스미스는 이 문제를 노동 시간이라는 단위를 상정함으로써 해결한다. 그 물건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 시간이 얼마인지를 측정함으로써 물건의 가치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신발 하나를 만드는 데 총 10시간이 소요되고 책상 하나를 만드는 데 총 5시간이 걸린다면 신발은 책상의 2배 가치를 가지는 셈이며 따라서 신발의 가격 또한 그렇게 책정된다. 당연히 신발과 책상을 만드는 인부들에게도 같은 셈법으로 임금이 지급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첫 번째 문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똑같은 신발을 만들어도 어떤 사람은 9시간 어떤 사람은 11시간이 걸린다면 어떡할 것인가? 9시간 걸려 만든 신발보다 11시간 걸려 만든 신발을 더 높은 가치로 평가할 것인가? 아니다. 스미스는 사회적인 평균 시간을 활용했다. 만약 평균적으로 신발을 만드는 시간이 10시간이라면, 실제 인부가 신발을 5시간 걸려 만들든 20시간 걸려 만들든, 그 신발의 가치는 동일하게 10시간짜리로 간주했다. 인부들의 임금 또한 사회적 평균에 맞추어 계산했지 개개인의 노동 시간을 책정하진 않았다.


위와 같은 생각에는 모든 인간들의 노동의 질적 차이가 없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 숙련자가 하든 미숙련자가 하든 어쨌든 완성품을 만들기만 하면 그 상품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생각 말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능력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이 훗날 미국과 프랑스 인권 선언에서 평등의 개념을 낳게 한 사회적 통념을 제공하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 또한 그러한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의 소유 개념과 노동가치설을 그대로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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