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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25. 2019

소통이라는 이름의 편견

영화 <증인>의 위선과 망상

* 스포일러 포함


-1.

내가 정말 싫어하는 표현 중 하나가 ‘장애우’라는 말이다. 저 말에서 ‘우’는 친구라는 뜻인데,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일말의 존중의 뜻을 담은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민 또는 시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다 친구처럼 대해야 하는가? 편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상대를 무턱대고 부정적으로 대하는 것과, 상대를 무작정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애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0.

작년에 한 친구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보고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처음에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그 영화가 말하려는, 소외받은 자들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것이 소외된 자들의 사랑이기 때문에 다수의 사랑보다 더욱 순결하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또 다른 편견이다, 소수의 사랑=순결한 사랑/다수의 사랑=속된 사랑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라는 것.


1.

내가 영화 <증인>에서 느낀 일말의 찜찜함과 기묘한 모욕감의 정체를 한동안 곱씹어 보았다. 그것은 영화에 나오는 이 한 마디: “자폐아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에 모두 압축되어 있다. 이미 영화는 자폐아를 100% 순수한 선의 결정체로 묘사하겠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편견의 또 다른 이름이며, 자폐아를 긍정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우가 순호에게 묻는, “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에서처럼, 보통 ‘사람을 이용하다’라는 표현은 그 사람을 토사구팽한다는 뜻으로, 부정적인 의미다. 영화는 자폐아인 지우를 그와 같이 이용하지는 않지만 다른 의미로 ‘이용’하는 것은 맞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와 정의라는 의미에서의 이용이라는 게 차이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용’이 상대를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영화는 선과 악의 대립 구도가 명확하다. 순호, 길재(순호 아버지), 희중(순호의 변호인=미란을 기소한 검사), 현정(순호의 대학 동기), 그리고 지우는 순결한 선의 인물들이고 나머지 인물인 미란 만호 병우 등은 세속에 오염된 악을 대변한다. 이 구도는 다양한 면에서 대비가 명확한데 우선 선에 해당하는 인물만 지우와 진실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점. 또 선한 인물이 영화에서 승리(?)한다는 점이다.


순호와 희중이 애초에 지우와 친분을 쌓으려 한 이유는 오직 재판 때문이지 지우라는 개인에 대한 호감이나 친밀감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이 끝나고 영화가 끝나는 시점에서 순호와 지우의 관계도 끝난다. 다만 그 관계가 진실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지우에 대한 순호의 접근 노력을 영화가 아름답고 순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순호는 지우를 선량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한다는 점에서 좋은 사람인 건 맞다.


그럼에도 순호는 끝내 지우를 한 사람의 개체로 대우하지 않고, ‘자폐아’라는 범주로 대하는 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한 번은 실수로 법정에서 지우를 ‘장애인’으로 명명한다는 점에서(물론 그것에 대해 순호 자신도 실수임을 인정하고 나중에 지우의 엄마와 지우에게 사과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자폐아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와 “어떤 자폐아는 특정 능력을 지닌다”는 명제를 통해 재판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건의 진범이 잡히고 재판이 정의롭게 끝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지우를 지우 개인으로 보지 않고 끝까지 ‘자폐아’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그것을 ‘진정한 소통’이라고 포장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악마적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일종의 미러링이라고 해두자). 우리는 “비자폐아는 가끔 거짓말을 한다”라거나 “비자폐아 중 일부는 어떤 특성을 지닌다”라는 명제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두 명제를 비자폐인에게 전적으로 적용하여 그를 간주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요한 주제 의식이 ‘사람은 모두 다르다’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의 끝에 영화가 말하는 건 결국 ‘자폐아는 모두 이러하다’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끝난다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만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것을 지우의 ‘주체적 선택’이라는 껍데기로 포장함으로써, 벌어진 모순을 억지로 봉합하려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더더욱 위선적이고 사악하다.


세상의 때와 악에 물들지 않은 선량한 사람들이 자폐아를 정의롭게 ‘이용’하는 것. 지우를 개인이 아니라 자폐아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간주하는 것. 자폐아인 지우를 순진하고 순결한 인물로‘만’ 묘사하는 것. 지우의 선택을 자신의 꿈을 위한 ‘주체적 선택’으로 처리한 것. 끝내 지우가 세상의 때와 악에 찌든 세속적 인물들과 마주하지 못하도록 벽을 쳐놓은 것. 그러면서도 ‘자폐아와의 진실한 소통’이라고 홍보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미학적인 장치로 수단화하는 영화 <증인>은, 결코 관객과 자폐아 사이의 소통을 성공시킬 수 없을 것이다.


2.

<증인>은, 더 나아가 비자폐인들끼리의 소통도 불가능함을 보인다. 그리고 영화 스스로 자신의 슬로건인 “모든 인간은 다르다”를 다시 한 번 부정한다. 이제 그 또 다른 모순의 방식을 보자.


<증인>에서 소통의 대상이 오직 자폐아 지우에게 한정된다는 점에서 이미 영화의 시선은 시혜적임을 위의 1.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거꾸로 말하면 영화는 지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는 소통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순호는 자신의 고객인 미란의 변호를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란과의 소통보다 증인인 지우와의 소통에만 전념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순호는 미란과 말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청포도 사탕 하나에 마음이 움직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고인 미란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만약 그가 미란과 제대로 된 소통을 시도했다면, 미란의 주변 정보를 철저하게 조사했다면, 굳이 지우를 법정에 증인으로 세워도 될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피살자와 그의 아들 만호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이뤄졌더라면, 충분히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지우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지우를 제외한 다른 사건 관계자들=비자폐증자들은 ‘범속한 인간들’로 범주화된 채 화면에서 멀찍이 밀려나게 되는 ‘이중의 대상화’를 겪는다.


<증인>은 정신 질환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죄의 유무에 대해서는 냉혹하다. 죄가 있는 자들에게도 분명 자신만의 세계가 있을 텐데, 영화는 그들의 삶과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결국 그들이 ‘인간 실격’으로 추락하게 내버려둔다. 왜 죄 있는 자들과의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더욱 주목할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 지우‘인간 실격’에서 구제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지우가 끝내 한 명의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의 방점은, ‘자페 스펙트럼을 앓음에도 불구하고’에 있지 않다. 지우가 끝내 법정에 자발적으로 참석해 진범을 가려내는 선행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결국 <증인>이 말하는 인간의 ‘자격’이란, (정신질환의 유무와 관계없이) 죄가 없으며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범속하지 않고 선량한 인물 군상에 국한된다. 지우가 사회로부터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수 있었던 건, 자폐아이기 때문도 아니고 지우이기 때문도 아닌, 정의를 실현한 선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인>은 사회화된/강제된 선(善)을 향한 인물들의 사투를 ‘소통’과 ‘주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한다.


-2.

몇 년 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는 미국의 정치 서적이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선거 때마다 우리도 비슷한 질문을 한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노동자들이, 보수 정당에 투표할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유사한 의구심을 던졌다. 아니 대체 왜 가난한 백인이, 흑인이, 히스패닉이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까?


하지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들은 흑인이기 ‘때문에’ 혹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에게 투표하는 게 아니다. 흑인이라는 범주와 무관한 다른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물어볼 상상도 의지도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사람들을 특정 범주로 묶어서 생각해 버리고 만다.


<증인>이 인물들을 대하는 방식도 위와 다르지 않다. 영화가 자폐아를 대하는 방식,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들을 인간으로서가 아닌, 여전히 그들에게 붙은 태그로 그들을 판단한다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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