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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31. 2019

3-10. 이 사회가 종말하는 방식

공산주의 혁명의 진짜 의미

그렇다면 왜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착취하는 자본가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는가. 그것은 노동자의 수가 자본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했듯 임금은 노동자의 노동에 따라 책정되지 않고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이란 노동자의 실제 능력의 질적 차이를 반영한 개념이지만, 노동력은 단지 양적 개념으로 A씨가 하든 B씨가 하든 동일한 양으로 계산되며 따라서 시장에서는 똑같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꼭 그 노동자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동일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간주된다. 해당 노동자가 반기를 든다면, 자본가는 그 노동자를 해고하고 다른 노동자를 고용하면 그만이다. 자본가에 비해 노동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므로 항상 일정 비율의 노동자는 실업 상태에 머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실업자를 ‘노동 예비군’이라 지칭한다. 마르크스에게 실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가 낳는 필연적 결과다.


사회 구조상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이제 오만해진 자본가는 자신의 이윤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해 애쓴다. 마르크스는 그 방법을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여기서 잉여가치란 자본가가 얻는 이윤과 동일한 개념이다.


우선 절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방법인데 이는 단순하다. 노동자가 근무하는 시간을 늘이면 된다, 예를 들어, 하루에 8시간을 근무시키고 4시간만큼의 임금을 주면 4시간 노동만큼의 이윤을 자본가는 얻는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에 10시간 근무시키고 5시간만큼의 임금을 주면 5시간 노동만큼의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노동법이 없던 과거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잠자는 시간을 빼고 거의 하루종일 일하도록 시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하루 14-16시간 근무는 기본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1960-70년대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하루는 24시간이며 그 중 잠자고 밥 먹고 쉬는 시간 정도는 최소한 제외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 획기적인 방식은 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방법이다. 절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게 노동의 양을 늘이는 방법이라면, 상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의 질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성과급제도를 두어 노동자들끼리 경쟁하게 만든다든가.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새로운 기계나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새로운 상품 생산법(=지적 재산)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노동자 1명당 1시간에 N개의 상품을 만들었지만 새로운 기계 또는 시스템 덕분에 노동자 1명당 1시간에 2N개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혹은 질적으로 개선된 상품을 1시간에 N개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도 좋다. 그때에도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동일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훨씬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문제는 그 방법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한 기업이 먼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새로운 생산법을 개발하면, 경쟁 업체들이 뒤따라 도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해당 상품 시장이 상향 평준화될 것이고 자본가에게 떨어지는 이윤은 다시 전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자본가끼리의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기계를 들이거나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새로운 생산법을 개발하는 것은 공짜로 되는 게 아니다. 갈수록 그 비용은 증가할 것이고 경쟁이 심화된 어느 순간 전체 비용에서 불변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아져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상품 생산 비용은 크게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으로 나뉜다. 여기서 불변 자본에 드는 비용은 낮게 책정할 수 없으며 오직 가변 자본(=노동자의 임금)을 낮게 잡음으로써 이윤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전체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불변 자본이라면, 반대로 말해 생산 비용의 극소수만 가변 자본이라면, 자본가는 더 이상 이윤을 남길 여지가 거의 0으로 수렴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기업은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모든 상품 시장에서 그러한 순간이 온다면, 자본가들은 단지 자신이 자본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윤을 취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본가라는 계급은 붕괴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의 소유가 어떠한 메리트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소유한 모든 생산 수단(=자본)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돌아간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그 후의 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라 지칭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신들끼리 단결하여 억지로 혁명하라고 부추기지 않았다. 그는 역사의 필연에 의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가 붕괴하고 공산주의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쉽게 말해 그의 공산주의 사상은 주관적 주장이 아니라 객관적 분석인 셈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문장은 수사적 선언에 불과하며, 그것을 후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각자의 관점에 따라 재해석한 것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마르크스 본인의 생각이라고 잘못 전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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