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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Feb 12. 2019

3-11. 유령의 보이지 않는 손

공황의 원인

고전경제학은 시장을 무한공급자와 무한수요자의 무한 경쟁을 전제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현실만 봐도 그 말은 허구임을 알 수 있다. 통신사는 3사뿐이며, 각 부문에서 활동하는 기업은 대부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자동차? 아파트? 마트? 제과? 많아도 두 손을 넘기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마르크스는 이를 ‘집적’과 ‘집중’으로 설명한다. 집적이란 남은 이윤을 기업에 재투자하여 생산수단이나 노동력 등을 추가로 늘려 사업의 규모를 확장하는 것을 말한다. 집중이란 경쟁에서 살아남아 우위엔 선 기업이 도태된 기업을 인수·합병해서 규모를 키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대기업’이라 불리는 몇몇 회사들이 선두에 서고 그 아래에 하청 및 파견을 맡는 중소기업이 떠받치는 구조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또 다른 자본주의의 필연 중 하나가 공황이다. 사람들이 흔히 믿어 의심치 않는 오해가 있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했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장 밥티스트 세가 주장한 “모든 생산은 소비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우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은 딱 1번 나온다. 그것도 수사적인 표현으로 나오지, 자신의 주요한 개념이나 방법론으로서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담 스미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의 ‘도덕감정’이며 그것을 통해 세상은 중립적이고 공평하게 운영된다고 스미스는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세의 법칙으로 알려진 ‘생산=소비’라는 생각 또한 비현실적인 망상이긴 마찬가지다. 기업에서 만든 상품이 몽땅 다 팔리면 얼마나 행복하겠냐마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윤이 실제로 창출되는 순간은 상품을 생산하는 시점이 아니라 판매하는 시점이다. 그리고 판매 시점에 화폐는 자본으로써 작용한다고도 앞서 언급했다. 그런데 현실에는 팔리지 않은 재고가 수두룩빽빽이다.


아주 쉽게 말해, 공황의 원인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기 때문이다. 공급과 수요가 같다면 가장 행복하겠지만. 아니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다시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양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과잉공급이거나 과소소비다. 그리고 다시 그 근본적인 원인은 크게 2가지로 설명 가능하다. 하나는 사람들의 탐욕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 생산과 소비 과정의 전반적 분리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특징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사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으로 규정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생각은 달랐다. 인간의 행동 패턴을 규정하는 것은 그 사회의 경제 구조라고 보았다. 정확히 말해 누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 등의 전반적인 사정=생산 구조에 따라, 그리고 그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끊임없이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려는 것은 자본가 개인의 선악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라도 자본가가 되면 그럴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것, 소비자가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최대한 싸게 사려는 것 또한 동일한 이치다. ‘합리적 인간’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특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자는 저마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택을 행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하나의 상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전반적인 과정이 쪼개져 있다는 거다. 투자하는 사람 따로, 기업을 설립한 사람 따로, 그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 따로,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 따로, 완성된 상품을 구매하는 사람 따로. 그리고 그들의 이익은 톱니바퀴 맞아떨어지듯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복사기의 어느 한 부분에 용지가 걸리면 복사 과정은 모두 멈추고 만다. 어느 하나의 과정이 다른 과정의 속도와 맞지 않으면 전체 과정은 어그러진다. 그것이 공황이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맹신하며 생산된 상품이 언젠가 다 판매되리라고, 혹은 생산과 소비가 저절로 균형을 맞춰 가리라 믿지만, 그것은 이상을 억지로 현실에 끌어들인 망상 또는 환상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상을 가져와 현실이 되리라고 혹은 그렇게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덕이거나 정치이지 학문의 영역은 아니다.


투자와 생산과 소비의 속도와 양이 저마다 다른 것이 공황의 원인이라면, 그 처방 또한 명확하다. 전체 과정의 속도와 양을 일관되게 맞추면 된다. 생산에서 소비가 일방향적인 과정이 아니라 양방향적이며 따라서 전체 과정은 순환적이라는 생각. 그런 이유로 국가가 나서 경제 전반을 지휘하고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개입해야 한다는 통찰을 세상에 설파한 사람이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즈였다. 그리고 그는 그 생각의 상당 부분을 마르크스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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