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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Feb 19. 2019

3-13. 가난한 자본가 vs 부자 노동자

선과 악의 이분법이 가리는 진실

현재의 우리가 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체로 소득 또는 자산 크기다. 보통은 연소득을 기준으로 10분위로 나누어 상류층~하류층 등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러한 관행 때문에 소득 9-10분위 등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소득 1-2분위 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생각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마르크스가 생각한 계급의 구분 기준은 재산의 크기가 아니라 생산 영역에서 점하는 위치다. 자본을 소유하고 그것을 활용해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여 이윤을 얻는 자가 부르주아이며, 자본이 없어 자본가에게 고용돼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자가 프롤레타리아다.


예를 들어 보자. 삼성이나 현대 등의 대기업에서 과장·부장 자리에 앉아 억대 연봉을 벌어도 그는 프롤레타리아다. 주요 상권에 프렌차이즈 편의점을 3-4개씩 소유하여 몇 억의 순이익을 얻는 점주라도 본사에 의해 개런티를 착취당한다는 점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다. 반면 동네에 핸드드립 카페를 운영하며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카페 주인은 어쨌든 부르주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법적 지위 또한 무관하다는 것이다. 프렌차이즈 카페 사장이든 동네 카페 사장이든 둘 다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이지만, 그가 상품 경제 구조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며 전체 생산 구조에서 그가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이냐에 따라 계급은 구분된다. 같은 이유로 1년에 몇 십 억을 버는 유명 배우나 가수들도 프롤레타리아다. 기획사와 방송사라는 거대 기업에 소속되어 투자자들에게 착취당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살았던 당시 성별/지역/인종 등에 따른 차별은 더욱 극심했다. 마르크스 또한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차별보다 계급 차이에 더욱 집중했다. 그 이유는 계급 차별을 낳는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근본적인 해법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해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문제는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면 나머지 차별도 모두 해소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노동자 계급뿐이다.


이쯤에서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전근대사회의 노예와 농민들이 애초에 혁명했더라면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 사회로 직행할 수 있지 않았냐고 말이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노동자 계급은 연대가 가능하지만, 농민 계층은 연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분업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혼자 완성품을 만들 수 없다. 다양한 생산 영역의 노동자들이 (비록 시/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협업해야 상품이 완성된다. 자본가들은 꼭 특정 노동자가 아니어도 상관없고 어떤 노동자든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며 노동자 간 관계를 경쟁 구도로 대하지만, 노동자 개인을 무시할 수는 있어도 노동자 계급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그들의 이윤은 노동자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 특정 분야의 노동자들만 결여되어도 산업 전체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그것이 타 분야 노동자들 간 연대를 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농민은 혼자서 수확물 생산까지 모두 담당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이 밭에서 일하는 농민과 저 밭에서 일하는 농민은 경제구조상 연결되어 있지 않다. 농민들은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산 활동을 영위한다. 특정 밭의 농민이 파업해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과 그가 부양하는 가족뿐이다. 그러므로 연대를 이끌어낼 수 없다. 반면 노동자의 경우 특정 부류가 파업하면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산업 전반에 영향이 미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벗어나야 할 오해는 이것이다. ‘자본가:노동자=악:선’의 구도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 흔히 탈세 안 하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윤리적으로 기업을 운영하고 기부까지 하는 자본가를 선량하다며 추켜올리고, 탈세에 허위 마케팅에 맷값 주고 폭행까지 일삼는 자본가를 악의 축으로 치부한다. 사람들은 자본가들이 전자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가 개인의 인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자본가라는 점에서 그가 착하든 악하든 착취는 필연적이며, 그러므로 선량한 자본가를 존중하는 행태는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영속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노동자들은 불쌍하게 피해 받는, 선량한 천사라는 이미지 설정은 자본주의 극복에 걸림돌이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했던, ‘헤겔의 변증법은 물구나무 서 있다’는 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현 체제가 불평등한 이유는 사악한 자본가와 선량한 노동자라는 도덕성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그러한 시스템 자체의 본연적 문제라는 것이다. 도덕이라는 관념 때문이 아니라 생산 구조라는 물질적 토대의 차이 때문에 불평등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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