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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Feb 22. 2019

3-14. 혁명은 과학이다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의 차이

자본주의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도덕성 결핍이 아니라 생산 체제 구조 전반의 문제라고 생각한 마르크스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실패 원인 또한 과학적 분석에 입각하지 않고 운동가 개인의 이상에 따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표적인 예가 로버트 오웬의 사례다. 오웬은 본인은 자본가였지만 자신의 이익을 셈하지 않고 오직 노동자들의 복지를 우선순위로 생각했다. 그는 다른 자본가들도 자신처럼 윤리적이고 헌신적인 기업 운영을 한다면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오웬은 19세기 유럽 사회가 불평등한 원인을 자본가의 부도덕으로 봤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 개인의 윤리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접근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가 반드시 노동자 계급이어야 하며 자본가일 수 없다는 점에서도 틀린 해법이다. 설사 오웬의 소망대로 세상 모든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삶을 우선시하여 선량한 기업 운영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생산 수단은 자본가들만 독점하게 되며 자본가들이 얻는 이윤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그것은 어쨌든 노동자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상품의 입지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소외’ 개념이 나온다. 원래 소외는 헤겔이 주창한 개념이다. 인간은 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든 허상을 실체라 믿는데 나중엔 반대로 그 허상을 인간 존재 위에 두어 떠받드는 현상이 소외다. 자신이 만든 대상에 종속되어 주체성을 잃는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개념을 마르크스는 생산 관계에 적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의 본질을 자아실현이라고 보았다. 노동이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경험의 장이며 따라서 노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분업화되고, 노동자의 노동이 노동력으로 거래되는 과정에서 노동자 개인은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의 인격체로 거듭나는 데 실패한다.


노동자의 노동은 단지 상품을 완성하는 1/n의 과정 중 일부일 뿐이며 거기서 노동자는 어떠한 보람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그가 일하는 이유는 임금을 얻어 생존을 영위하기 위함이므로 이제 노동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노동자 개인의 노동은 꼭 그가 행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노동자 누구와도 대체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의 인성은 무시된다. 노동자의 탈인격화와 물화. 노동도 노동자도 단지 자본의 자가 증식을 위한 부품일 뿐이다. 그의 노동에서 생긴 이윤은 대부분 자본가의 몫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국가의 시스템 전체가 그러한 세태를 옹호하지 않는가.


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부당하거나 낮은 대우를 받으며, 같은 노동자끼리도 인격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갖지도 못하고, 자신이 노동한 만큼의 대가도 온전히 받지 못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임금을 얻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일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와 같은 거래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분배와 호혜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 사회에서 사람들이 노동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이 스스로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노동의 결과물이 거래되지 않으므로 노동은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노동을 통해 세상의 변화에 직접 작용한다는 느낌을 체화할 수 있다. 그러니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소외되지 않는다.


공산주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꿈꾸거나 이상적으로 기대한 것이 아닌) 이성적 추론을 통한 객관적 분석의 사유물이다. 마르크스는 결코 공산주의를 꿈꾸지 않았다. 우리는 해가 지면 다음 날 아침에 해가 뜨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다만 해가 당연히 또 뜰 것이라고 예측할 뿐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이론을 과학이라 불렀고, 자신 이전의 사상가들을 이상적 몽상가라고 여겼다. 마르크스의 ‘과학’은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운동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사상가들로 하여금 꿈꾸거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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