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을 얻은 영화감독이 새로운 광고를 찍는 과정에서 우연히 일어난 여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영화에 대한 영화, 메타 영화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는 주인공 토비가 감독 본인(=테리 길리엄)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감상하다 보니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의, 그리고 자신의 영화 인생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혔다. 그러므로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감독의 본심을 점친다 하더라도,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감독에게 있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일지도 모르고, 의도가 아닐지라도 분명 미필적 고의니까.
1. 첫 번째 갈등-과거와의 조우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를 몇 번 봤다면 느끼겠지만, 스타일이 거의 비슷하다. 온갖 현란한 시청각적 자극과 꿈과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다층적 플롯,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러티브를 빠른 편집과 혼돈으로 채워넣는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감독만의 고유한 개성이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기 복제다.
주인공 토비가 광고 촬영현장에서 조우한 것은, 자신의 졸업 작품이다. 그는 일부러 로케이션도 똑같은 곳으로 골랐다. 그 작품으로 유명세를 탔거니와 본인 스스로도 졸업 작품에 대한 향수와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작품을 찍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촬영 기간 동안 자신의 졸업 작품을 두 번이나 볼 기회가 생기지만, 토비는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지 않는다. 첫 번째 감상은 보스의 부인 재퀴와의 정사 직전인데 그때 보스가 나타나는 바람에 토비는 줄행랑 치고 만다. 이 씬은, 자기복제 유혹을 느끼는 감독의 안이함에 대한, 오너의 단호한 금지 명령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토비는, 길리엄은, 자기복제의 유혹을 어쩔 수 없는 외부의 압력으로 간단히 극복한다.
두 번째 감상 기회는 과거 촬영 로케를 찾아갔을 때다. 작품 푸티지를 조악한 관광상품으로 팔아먹으려는 정신나간 할머니에 의해 우연히 필름 영사기로 보게 되는데, 그때도 토비는 자신의 작품에 마음을 쏟지 못한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과거 작품의 주연인 하비에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갈등-배우와의 충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우 하비에르는 제정신이 아니다. 작품을 찍은 지 이미 1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하비에르는 자신이 정말 작품 속 돈키호테라고 믿는다. 배우 황정민의 수상 소감처럼 가혹하게 말하자면, 배우는 감독과 스텝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 얹는 것이기도 하다. 감독의 세팅이 없었다면 배우가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나 있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시골 마을 구두 장인이었던 하비에르를 꿈꾸게 한 건 토비였다. 비록 그 꿈이 헛된 망상이 되어 현실의 하비에르를 죽여 버렸지만 말이다. 그것은 졸업 작품의 여주인공이었던 안젤리카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좇다가 자본가들에게 몸을 파는 그렇고 그런 여성-배우가 되었다. 그 둘의 최초 원인 제공자는 어쨌든 토비다.
차이가 있다면 하비에르는 역할 속 인물을 현실로 받아들였다면, 안젤리카는 현실의 배우라는 직업을 꿈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둘 다 그 꿈 때문에 실제 삶을 망쳤다는 건 동일하다.
그리고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 둘은 오히려 토비에게 큰소리치며 토비를 자신들의 꿈을 위해 이용한다. 예전에 토비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두 사람을 (배우로서) 활용했듯 말이다. 돈키호테가 된 하비에르에게 토비는 산초 판사여야 한다. 그러다 토비는 정말 산초가 되고 만다. 광고 촬영은 아랑곳없이 하비에르에게 끌려다니며 얻어맞고 욕먹으며 혼나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토비는 계속 산초인 척 하비에르의 꿈-역할 놀이에 맞춰준다.
3. 세 번째 갈등-자본의 규제
이야기는 산 넘고 물 넘어, 하비에르는 정말 돈키호테가 될 기회를 얻는다. 토비의 광고주 알렉세이가 연회에서 선보인 소품극 안에서다. 우연히 극에 주연을 맡은 하비에르는 다시 한 번 돈키호테가 되어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올라 태양에 다가간다. 물론 그것은 연극적 연출에 불과하지만, 하비에르는 자신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돈키호테라고 생각하한다. 그의 지나친 진지함이 연극에 더욱 몰입감을 주며 연회에 참여한 관각들에게 배가된 웃음을 선사한다.
배우가 꿈을 성취한 순간이, 관객들에겐 가장 웃긴 순간이라는 아이러니. 그것이 배우라는 직업의 필연일까.
그리고 자신이 꿈을 성취했다고 믿은 순간 말에서 떨어진 하비에르는 꿈에서 현실로 급추락한다. 자신이 돈키호테가 아니라 하비에르임을 깨달은 것이다. 혹은 정신나간 척 그만하고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동시에 토비는 극에 너무 몰입했던지 현실과 극을 혼동하고 만다.
알렉세이는 안젤리카를 불태우는 연출을 선보이는데, 토비는 그것이 현실이라 오인한다. 안젤리카를 살리려고 구출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토비는 하비에르를 죽이게 된다.
작품 현장에서 줄곧 배우와의 마찰을 겪으며 배우에게 끌려다니다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고집센 감독의 모습을, 그 장면에 엿보았다면 지나친 걸까. 그럼에도 거기까지의 작업이 감독의 계획과 의도가 아니라 배우의 고집과 우연에 의해 구축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영화라는 작업의 우연성과 협동성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허나 끝내 ‘영화’라는 매체의 키를 잡은 자는 감독이 아니다. 토비와 하비에르를 극이라는 미로에 빠뜨리고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용쓰게 만든 건 결국 알렉세이이기 때문이다. 영화판을 짜는 건 더 이상 감독이 아니라 자본가이고 투자자이고 제작자다. 감독이 배우를 꼭두각시 인형 놀이시키듯, 실은 감독을 마리오네트로 만드는 건 자본이다. 토비는 자신의 제작자인 보스에게 꼼짝 못하며, 보스는 광고주인 알렉세이에게 쩔쩔맨다.
여기서 토비가 벗어나는 방법은 둘이다. 돈키호테라 스스로 믿는 배우를 죽이고 자신이 직접 돈키호테가 되는 것이다. 아니 미친 척하는 것이다. 자신이 돈키호테인 척 말이다. 비록 현실이라는 거인(=풍차)에 걸려 금새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여배우의 꿈을 꿔온 안젤리카와 함께 그는 태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현실 너머에는 꿈이 있는데, 그 꿈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토비의, 테리 길리엄의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