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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un 27. 2019

미국 사회의 마스터베이션?

영화 <노예 12년>에 대해 내가 묻고 내가 답함

1.

Q. 역사적 아픔을 다룬 작품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영화를 꼭 안 봐도 해당 역사적 사실을 대부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노예 12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그것을 영화로 보는 것이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가?


A.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몇 단어의 정보로 아는 것과 감각 정보와 스토리를 통해 느끼는 것은 다르다. 영화는 노예제도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둘째는, 한 가지 소재에 관해 다양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령 우리는 사랑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으며 실상 자신의 삶에서 수없이 많이 직접 경험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똑같은 패턴의 로맨스 영화를 반복해서 본다.


엇비슷한 사랑 영화는 주구장창 보면서 왜 특정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는 한편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한 사건에 대해서 여러 관점이 있으며, 같은 관점이어도 그것을 풀어내는 이야기 방식이나 편집 연출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미학을 끄집어낼 수 있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많은 작품을 보는 게 좋다. 그것은 전혀 지겨운 작업이 아니다.




2.

Q. 작품 속 주인공 노섭은 굉장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작품이 끝난 이후에 책을 쓰고 인권 운동을 이끈다고 자막으로는 나오지만, 이야기 속 노섭은, 다른 흑인 노예들의 삶에 깊이 관심 보이진 않으며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다른 흑인을 자신과 동일시 여기는 것 같지 않다. 백인에 대한 저항 정신도 없으며, 자신만 탈출해 가족의 품에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며, 종종 자신을 백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보인다. 노섭을 그러한 모습으로 그리는 영화의 시선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 그 시선이야말로 이 영화의 독특한 지점이다. 흔히 이런 소재에서 동정과 연민, 연대와 협력을 주제로 삼기 쉽다. 그래서 흑인 노예들끼리 뭉쳐 합심하여 탈출을 계획하고, 백인에 대한 노골적인/감춰둔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노예 영화의 한 전형일 수 있다.


하지만 <노예 12년>은 전혀 그런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 노섭을 철저히 개인주의자로 내세우고, 흑인 공동체의 문제라기보다 노섭 개인의 시점에 철저히 국한해서 사태를 보여줌으로써, 한 사람의 인생을 조망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그것이 결국 사회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드러냈다. 만약 연민과 연대라는 카드를 들었다면, 이 영화는 드라마가 아니라 교육용 모큐멘터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3.

Q. <노예 12년>이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지 모르겠다.


A. 그 부분은 동의한다. 나는 그것이 미국 사회의 PTSD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미국 내에서는 흑백의 차별이 명백히/은연 중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인권 의식이 성장한 것은 맞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장한 만큼 혹은 성장 이상의 제스처를 취한다는 데 있다. 이 영화에 아카데미상을 준 것도 일종의 제스처라고 본다. 미국 사회는 진보해 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그런 의미에서 사실 아카데미수상은 미국 지성의 마스터베이션이기도 하다. 현실은 비록 개차반이어도, 자신들은 이런 영화를 보며 역사적 아픔을 잘 알고 그것을 속죄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것과 관련해 재미있는 지점이, 감독 스티비 맥퀸과 함께 브래드 피트가 공동제작자라는 점인데, 브래드 피트가 극중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백인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미국 상류층 백인의 자위라는 관점에 알리바이를 더하는 근거로 보인다.




4.

Q. 답변에 이어서 질문하자면, 이러한 영화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고 좋은 상까지 수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백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권 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한 수단이 된 느낌이랄까.


A. 여전히 현실에서는 흑인 출입을 금지하면서도 영화관 가서는 이런 영화를 보며 울고 분노하면서 훌륭한 영화라고 극찬하는 백인들의 이중적인 행태가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과 수상 소식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울림을 줄 거라는 점에서,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고무적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이 한편으론 현재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을 극복했다는 안도감을 줄까봐 우려되기도 한다. 혹은, 사회적 의식 차원에서는 인종차별이 극복된 듯 여겨지면서도 사회적 무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모종의 차별이 작동하는 이중의 메커니즘을 공고화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작품을 만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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