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랭 뒤카스: 위대한 여정>의 반대편
친구 A는 여름휴가를 반드시 워터파크로 가야 적성이 풀린다. 바다에 가는 것도 시큰둥. 계곡이나 냇가엔 왜 가냐는 투다. 수영장에 가는 것도 지루하단다. 그는 자신에게 확실한 즐거움과 짜릿함을 줄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워터파크의 어트랙션과 파도타기와 유수풀이다.
평소에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마찬가지다. 삼겹살에 술 한 잔 마시는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때도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같은 놀이공원이나, 하다못해 무언가를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원한다. 그것도 아니면 멀티방에라도 가야 한다.
친구 B는 여행을 왜 가는지 모르겠단다. 인천 바다나 부산 바다나 제주 바다나 바다는 다 똑같은 바다인데 왜 사람들이 다른 지역을 가는지 이해할 수 없단다. 카페를 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집앞에 있는 스타벅스와 다른 동네에 있는 스타벅스가 뭐가 다르냐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데이트 때마다 힘들어한다. 어디를 가든 다 똑같이 느껴지는 그에게 데이트는 밥 먹고 차 마시고 여가를 즐기는 반복되는 순환 작업일 뿐이다. 그에게 장소의 차이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나는 두 친구의 공통점이 불감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두 친구가 하는 말이 이해는 된다. 부산으로 가나 괌으로 가나 본질은 똑같다. 예쁜 경치를 보고 맛난 걸 먹고 놀고 오는 것이다. 다만 그들에겐 그것이 ‘똑같이’ 놀이로 지각될 뿐이다.
이 두 친구와 완전히 반대 측에 선 인물이 기억의 천재 푸네스다. 물론 실존 인물이 아니라 보르헤스의 소설에 나오는 작중 인물이지만. 푸네스는 이 동물과 저 동물이 같은 ‘개’라는 명칭을 가진 걸 이해 못한다. 이 생명체와 저 생명체는 생김새와 형태가 전혀 다른데 대체 둘의 공통점이 뭐냐는 말이다. 푸네스는 오히려 모든 개체들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심지어 한 나무에서 나온 잎사귀들의 차이점마저도 그의 눈엔 선명하게 보인다.
여기 미세한 차이점을 찾아 늘 새로운 맛을 쫓는 남자가 있다. 알랭 뒤카스. 그는 세상에 없는 맛을 찾아 세계 각지로 떠난다. 각 지역의 전통 음식을 음미하고 해당 지리에서 나는 특산물과 고유한 식재료를 맛본다. 물론 그의 미각이 모든 고등어의 맛을 구분할 정도로 미세하진 않지만, 그는 식재료 맛의 차이점과 조리에 따른 감각의 차이를 섬세하게 감지한다. 어쨌거나 그는 나의 두 친구들보다는 푸네스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나도 한때는 유려한 감각을 지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레몬과 라임과 오렌지의 향을 구별하기 위해 애썼고, 벨벳과 벨루어의 질감 차이를 식별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지금은 그런 훈련을 관뒀다. 가나 초콜릿과 고디바의 차이를 눈감고도 아는 것이 행복할까, 가나 초콜릿만 먹어도 맛있다고 느끼는 게 행복한 걸까.
알랭 뒤카스는 말한다. 궁극의 맛은 자연에 있다고.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의문이다. 애호박과 동과의 맛은 다르다. 하지만 누군가는 둘의 맛 차이를 못 느낀다. 이때 맛의 차이는 식재료에 있는가 혀 끝에 있는가. 그 맛을 구별 못하는 사람을 두고 음식맛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싸잡아 취급해도 될까. 평양냉면의 육수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하는 미식평론가 황교익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물론 알랭 뒤카스 평생의 노력은 세계인에게 다양한 미각의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는 점에서, 분명 그의 여정은 위대하다. 내가 비록 그의 식당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만든 수많은 메뉴들과 그가 운영하는 가게들은 음식 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것이 나에게도 간접적인 자극이 됐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문화적 차원에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의 여정이 절대적으로 위대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분명 나의 두 친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왜 그게 그거인 음식을 맛보기 위해 굳이 지구 반대편을 가냐고 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맛도 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기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