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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Dec 24. 2019

2-02. 미래라는 이름의 과거

이정표로서의 역사

유럽이든 아시아든, 고대 사회에서 역사는 이야기였다. 옛날이야기.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중국에도 역사는 옛날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는 사람만 등장하는 게 아니었다. 신이나 정령 요정 등도 인간 못지않게, 때로는 인간보다 더 중요한 등장인물이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는 신적인 영웅과 신들의 이야기를 더 중요하게 간직했다. 노자나 장자뿐 아니라 그전에 쓰인 책에서도 과거 선왕들의 초인적인 능력과, 세상을 처음 일군 우주신들의 관념적인 사건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때는 문학 신화 종교 역사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때였다. 지금의 우리가 대하는 역사와 달리 그 시절의 역사는 여러 학문과 분야의 특성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사실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그것들을 역사라고도 부르지만, 시라고도 부르고, 노래라고도 일컬으며, 신화나 종교라고도 지칭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이야기 속 인물과 사건을 몸으로 체화해서 믿을 뿐이지 그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거나 검증하고자 하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어릴 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울면 호랑이가 나타나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울지 않으려 애쓰면 그만이었다. 호랑이가 어떻게 먼 산에서 아이 우는 소리를 듣냐거나, 호랑이가 왜 우는 애만 잡아가냐거나, 그런 일이 언제 어디서 있었냐는 등의 의심과 비판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고대 사회에서 역사란, 교훈과 재미를 주는 콘텐츠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고대에는 개인에게 지침이 되는 무언가가 많지 않았다. 인간이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얻고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았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던 게 우리가 지금은 역사라고 부르는 과거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중세까지도 동일했다. 유럽의 경우 중세에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목소리는 신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과거 이야기란, 신이 오래 전에 행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들에게 역사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뜻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역사는 창세기전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1주일. 그리고 카인이 어떻게 아벨을 죽였는지, 아브라함은 어떻게 신을 끝까지 믿었는지, 모세가 어떻게 유대인들을 단결시켜 이집트를 탈출했는지 등등의 서사들이 중세인들이 알아야 할 역사였다. 중세인들은 신의 말씀에 버금가는 성경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조율해 나갔고 그러므로 그때의 역사란 삶의 나침반과 지도와도 같았다. 그것은 당대 사람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본(本)이었다.


근대 이전의 역사란, 해당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전승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물론 지금의 많은 인문학자들도, 역사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둥, 과거를 잊은 자에게 미래란 없다는 둥, 역사를 하나의 이정표처럼 여기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의 비유다. 현실의 레벨에서 사람들은 역사를 기저로 자기 개인의 삶을 구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 때는 달랐다. 당대 사람들에게 지금이란 역사의 컨트롤C + 컨트롤V였다.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일궈나갔고 그 궤도를 이탈한 삶이란 상상할 수 없었으며 궤도를 벗어나는 건 곧 타락과 죽음을 뜻했다. 따라서 역사란 신의 말씀이자 조상의 목소리였고 자연의 이치이자 우주의 섭리였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세상은 과거-현재-미래가 구분없이 동일하게 이어지는 불변의 시공이었다.


그러므로 고대 및 중세인에게 과거는 이상향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결국엔 도달해야 할 목표 지점이었다. 신이 만든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하므로 우주의 처음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상태였다. 신이 만든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건 논리적으로 모순이었고, 인간들이 신의 완성품을 해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따윈 있을 수 없었다. 과거와 현재를 개선한다는 건 어불성설. 지금까지의 완벽한 세상을 미래에도 계속 지켜나가는 것이 그들의 이상점이었다. 과거의 본(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다시 거기에 맞추는 작업. 과거라는 이상향의 지도가 되어준 것이 그들이 생각한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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