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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y 25. 2020

4-03. 저곳이 아닌 이곳의 철학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비판한 니체

인간은 행복을 원한다. 고통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여기서 마조히스트는 예외다. 그것은 성애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표출되는 수단적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마조히스트는 육체적/물리적/상황적 고통을 통해 더 큰 쾌락/행복을 추구하려는 자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마조히스트도 결국은 행복을 원하는 자다.


그런데 세계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 세계는 선험적으로 인간을 고통에 빠뜨린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지만 겨우, 한 순간,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고통이 있으면 행복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계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디폴트값이라면, 행복을 주는 것이 디폴트로 설정된 세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조화롭다. 이것이 그리스 철학자들,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적 추론은 도덕적 당위로 전환한다. 그러한 세계가 존재할 것이다, 가 아니라, 그러한 세계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의 존재론적 당위성이 성립되는 순간이다. 나아가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가 도덕적이고 선하며 우월한 세계라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이 세계는 부도덕하고 악하며 열등한 세계라고 인식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 거지 같은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저 선량한 세계=이데아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라고 평생 가르쳤다.


니체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이 현실과 이상의 전도이자, 과학과 도덕의 전도라고 생각했다. 현실 세계를 자기들 마음대로 고통스럽다고 규정한 다음,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가상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 세계에 도덕적/형이상학적 정당성/우월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쯤 되면 그들은 학자가 아니라 2류 종교인이라고 니체는 비판한다.


데카르트에 대한 니체의 비판도 위와 맥을 같이 한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쉼표에는 상당히 긴 사유의 과정이 함축돼 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는 감각적으로 포착되는 정보 말고 확실한 사실을 원했다. 그래서 우주 자체를 거짓 허상이라 가정했다. 꿈을 꾸고 있다거나 사악한 악마가 허상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우주가 가짜라고 의심하는, 혹은 악마에게 속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건 의심할 수 없더라는 거다. 그러니까 모든 게 다 가짜여도 본인만큼은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자신에게 악마의 허상을 가짜라고 의심할 줄 아는 능력을 준 것은, 악마는 아닐 거라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악마의 허상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은 당연히 악마보다 더 우월한 존재일 것이고, 따라서 그는 바로 신일 수밖에 없다고 데카르트는 판단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악마의 간계에 속지 않을 회의적 능력을 준 신이, 악마가 자신을 속이도록 내버려둘 리 없다는 생각까지 이른다. 그렇다. 우주는 신의 주재 하에 진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데카르트가 도달한 결론이다.


니체는 황당했다. 그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이성적 사유를 위해 신을 도입한 게 아니라, 신을 위해 이성적 사유를 하는 사람 같았다. 결과적으로 데카르트 또한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학자라는 이름의 종교인이었던 셈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와 신의 존재를 논증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미 선험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전제하는, 소위 순환 논증의 오류 혹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저질렀다는 게 니체의 분석이다.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라는 존재는 ‘생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이미 데카르트는 전제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나’와 ‘생각’을 분리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보자. “번개가 친다”라는 문장에서 사람들은, ‘번개’를 존재하는 대상으로 ‘친다’를 번개의 움직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의 문법에 기인한 사고의 습관일 뿐이다. ‘번개’ 없이 ‘치기’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치지’ 않는 ‘번개’도 존재할 수 없다. 번개 자체가 치는 것이며, 치는 것이 번개다. ‘나’라는 대상이라고 예외일까.


신을 소환하는 부분에서도 데카르트는 같은 오류를 저질렀다. 그는 신과 악마에 대해 도덕/부도덕, 선/악, 우월/열등이라는 이분법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신이 악마보다 모든 면에서 나으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데카르트 본인의 뇌피셜일 뿐, 신의 우월성 자체를 증명할 근거도 방법도 그는 제시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신과 악마 말고는 제3·제4의 대상은 존재할 수 없는 건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적 세계관을 빗대어 현실을 ‘겹쳐 읽기’ 하려는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 등의 철학을 니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체에게는 ‘저기’가 아닌 ‘여기’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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