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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모는, TMI가 좋은걸

episode.10

by 프리여니v


"난 아무거나."


한때 난 이 말이 좋은 말인 줄 알았다. 이건 당신의 취향과 선택을 먼저 고려하겠음을 알리는 말로, 나의 선택지는 빈칸으로 남기고 상대에게 선택지를 주기에, 상대를 배려하는 좋은 말이라고, 그때의 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누구에게든 "난 아무거나"라는 말을 가급적 하지 않지 않으려 노력한다. 단지 가끔 ‘여자어’를 유쾌하게 표현하는 짤 중 "아무거나" 버전의 영상을 보며 공감이 되어 낄낄 웃을 뿐. 그런 공감과는 별개로, “아무거나”에 담긴 뉘앙스가 내 의도였던 ‘배려’라는 키워드로 상대에게 전달된다기보다는 상당히 무책임하게 들린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건 내 취향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상대에게도 또는 나 자신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선택을 초래할 뿐이라는 걸, 지금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는 종교 기반 대학으로써, 개인의 종교 유무와 관계없이 학교에서 하는 예배를 몇 회이상 들어야 졸업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4년 동안 총 6회를 들어야 하며, 그중 2회는 대면으로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난 바쁜 3-4학년이 되기 전 대면 예배를 마무리 짓고 싶어, 이번 학기엔 이 예배를 대면 수업으로 수강신청했다.


채플 수업의 수업 방식은 큰 강당에 다양한 학과의 수많은 학생이 모여 예배를 듣는 식이다. 노래가 20분 정도, 설교 시간 20분 정도, 대부분의 학생이 무교인 점을 고려해 예배가 비교적 짧고 쉽게 진행되는 방식이다. 이 수업을 들으며, 무엇보다 내가 흥미로웠던 점은 예전에 비해 목사님의 연령대가 매우 낮아졌다는 점이었다. 내가 교회(대략 15년 전)를 다닐 때만 해도 사실, 30대 초반의 목사님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목사님이 갓 되신 분도 거의 40대는 되었었고, 30대에는 보통 전도사님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채플 수업을 통해서 재기 발랄한 목사님들을 보게 되어서 매우 신기했다.


게다가 그 목사님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직업을 겸하고 있었다. 예술 쪽으로 하는 분도 있었고, 정통으로 쭉 목사직만을 하고 있는 분도 있었다. 그 점에 나는 굉장히 고무적인 마음이 되었다. 왜인지 나도 그렇게 투잡, 쓰리잡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먼저 그렇게 멋진 행보를 보인 그 사람들이 굉장히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목사님이란 직함이 몇 년 전만 해도 조금 보수적이고 딱딱하게 보였는데, 나의 선입견을 깨준 이 수업을 들으며 신선한 마음이 들었다. 또한 한편으로는 난 역시 아직 멀었구나,라는 성찰도 들게 했다.


그 힙한 목사님의 설교 방식은 이러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하나님을 믿게 된 계기, 어려운 시절의 마음 이야기, 학교 생활 이야기, 결혼 이야기 등등 다양하고 자세하게 해 줌으로써 성경 말씀에 연관된 설교를 이어 나갔다.


나는 그 점에 크게 영감을 받아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난 어느 자리에 서서,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면 좋을까?' 마음에 감동을 받은 나는 그 감동이 나만의 것인지 문득 궁금해져서, 옆에서 함께 채플 수업을 듣게 된, 15살 차이 나는 꼬맹이 친구에게 물었다. "흠, 난 이 수업 재밌는 것 같아. 넌 어때?"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은 내 예상 밖의 것이었다. "어 언니, 이거 너무 TMI 아니에요?"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말이 꽤 재밌게 들렸다. '아, 맞지. 맞아. TMI.' 남들이 굳이 궁금해하지 않을지도 모를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그 이야기가 꽤 불편하고도, 굳이? 싶을 내용일 수 있겠구나.


어느 드라마의 대사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얼마나 급했으면, 네 개인사 팔아서 돈 버는 거야?" 그리고 연예인 모씨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자고로 자기 얘기를 너무 하고 다니면 안 돼. 입이 무거워야 해."


물론 나도 안다. 굳이 말해서 손해 볼 것들에 대해서. 개인사를 알려서 좋을 것이 무어겠냐고, 누구는 말하고 누구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현실에서 과하게 떠벌려진 그 개인사가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난 이제 나를 예술인이라고 칭하고 싶어서였을까? 난 생각했다. 예술인은 말해야 한다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 또는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게 표현해 낼 줄 아는 사람, 나는 그것을 자유롭게 해내는 사람이 예술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맺을 때도 나는 그랬다. 상대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그의 살아온 나날들에 어떤 언어, 색, 감정이 담겨있었는지, 그것들이 매우 궁금하다. 또 나의 이야기를 빌미로, 어떤 이의 마음에 점 하나 남기고 싶은 깊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위로이든 깨달음이든, 공감이든. 그냥 그의 마음에 나비 같이 날아가 무언가를 살포시 얹어 주고 싶다. 아주 따스하게. 그리고 그건, 남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살아낸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난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것 같다. 내 삶을 이야기해야 하고, 타인의 삶을 들어주는 일에 열성이 있게 생겨먹었다. 그것이 설령 누군가의 불편함으로 날아들지라도, 또는 나의 단점을 들추는 행위가 될지라도.


그래서 나는 그 꼬맹이 친구에게 말했다. "아 그래? 난 그래도 저런 TMI가 끌리더라." 그랬더니 그 아이 맑은 미소로 빙그레 화답해 왔다.





아무튼 내 입장은 그렇다. 배려는 “아무거나”와 같이 포괄적인 난센스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잘 알아가는 과정에서 생긴다고 보는 것. 그 과정 중에는 구체적인 질문이 필수이고, 그건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 구체적인 답안이 나오고, 구체적일수록 잘 알게 되는 거니까. 그래서 이 이모는 어쩔 수 없이 "TMI"가 좋다고, 채플 수업을 마무리하며 그 친구에게 괜스레 다시 한번 말해 보는 바였다.



TMI 좋은 사람, 여기 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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