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11
열다섯 살 차이는 기본, 대학을 1학년부터 시작하니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나이차가 열 살~열다섯 살은 기본이다. 물론 착한 나의 친구들은 나를 "언니"라고 다정하게 불러주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나 스스로 언니란 단어를 쓰기엔 내심 쑥스러워 "이모"라는 말을 나에게 붙여왔다. 그런데 이번에 방학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친정엘 다녀오면서 깨달았다. ‘맞다. 난 진짜 이모였지?‘
나에겐 어린 조카가 셋이나 있다. 일곱 살 남자 꼬맹이 하나, 다섯 살 여자 꼬맹이, 그리고 이십사 개월 된 여아 하나.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던 나의 오빠와 여동생이 어느덧 가정을 이뤄 아이를 낳아 나에게 조카를 셋이나 안겨준 것이다. 그 아이들이 어느덧 훌쩍 자라 나에게 "이모"라는 말을 쑥스럽게 건네온다. 아직은 입에 익지 않고 오랜만에 본 이모가 어색해, "이모 기억해?"라고 물어도, "아니"라고 말하며 배시시 웃으며 제 엄마 다리 사이에 숨기 바쁘지만, 그래도 이모에게 관심이 가는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설핏 설핏 이모의 동태를 살피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내심 귀여울 따름이었다.
난 아이 보는 데에 재능이 있는 편이다. 왜냐고? 아이와 눈높이 맞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겨 먹길 그렇게 생겨 먹었다. 첫째, 아이와 눈 맞춤을 꾸준히 할 것, 둘째, 아이에게 서서히 다가갈 것, 셋째,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를 찾아낼 것, 넷째, 예쁘게 웃고 과장되게 행동할 것. 이 정도 기술이면 아이를 사로잡기에는 충분하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의 관심에 순순히 마음을 내어주고, 또 언제나 놀 준비가 되어있다. 어른만 그것에 동참해 준다면. 그래서 난 이 이모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조카들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눈 맞춤을 하고, 괜스레 괴물 흉내를 내며 조카들을 잡으러 가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요놈, 요놈, 순수 덩어리 아이들, 금세 마음을 열고 우리는 친구가 되는 법이지.
사실 아이가 있는 집은 분위기부터 다르다. 아이와 맞춤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장은 기본, 웃음은 항상, 바른말 고운 말은 노력사항인 것이다. 아이는 순수한 파동으로 언제나 흡수를 준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은 아이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작은 움직임의 파장. 얼마나 센가. 아이가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어른들은 신기해하며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런 아이의 행보가 어떻게 사랑이 아닐까. 그 존재가 어떻게 빛이 아닐까. 난 아이가 사랑의 존재가 아니란 걸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이제 24개월이 넘어가는 조카는 시골 할미 집이 영 어색하기만 한 모양이다. 그 낯선 기류가 익숙지 않으니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터트리는데. 한참을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밥상에 겨우 앉히면 조카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기 바쁘다. 그래, 이상하고 낯선 나라에 도착했으니, 그 아이는 그 공간과 친해지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 중일까. 이모가 쥐어 준 젤리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엄마 아빠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가늠하며 두 눈을 끔뻑 끔뻑 요리조리 살피는 아기 조카. 그런 조카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이 이모는 눈을 뗄 줄을 몰랐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장소가 편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애정의 눈빛을 발산하며 종종 웃음을 건넬 뿐이었다.
그때 첫째 남자 조카와 눈 맞춤에 성공한 이 이모는, 슬금슬금 장난기가 발동한다. 으르렁 괴물 소리를 내며 널 잡으러 갈 거라고, 슬금슬금 다가가 배를 간지럽힌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혹은 의자를 사이에 두고서 아이를 잡겠다고 나선 이모와 이모가 어서 잡아주길 바라는 조카. 둘 사이의 흐르는 장난 서린 기운이 아기 조카의 긴장을 서서히 녹였는지, 연신 우리 쪽을 쳐다보며 관심 있는 눈빛을 보내온다. 그렇게 조카들의 마음과 서서 가까워지는 과정을 거쳤다.
"자, 그럼 이제 이모가 찾으러 간다. 어디있지~? 여기에 있나?"
"이모, 이모. 여기 있어. 까르르"
얼굴만 가리고선 제 온몸이 숨겨진 줄 아는 아기 조카, 조카의 온몸이 보이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듯 혼신의 연기를 펼치며 아이를 찾는 척하는 놀이. 아기의 반응이 귀여워 어른이는 이렇게 또 아기와 놀고 싶어 몇 번이고 하고 또 한다. 그럼에도 아이의 에너지는 따를 수 없는 법. "이모 또", “또”를 몇 번이나 외치는 아기 조카에게 은근슬쩍 "이제 엄마 아빠 찾으러 갈까?"하고 제안을 하는 이모. 넌 이렇게 머리를 굴리는 이모의 의도를 알까? 어른 셋은 있어야 아이 한 명의 에너지를 감당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부모 만세, 만만세.
시골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고, 나는 여동생의 집에 가서 잠을 잤다. 어린 조카가 잠들기 전까지, 여러모로 미룬 집안일을 하는 동생네 부부를 뒤로 하고, 나는 아기 조카와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조카가 좋아하는 작은 장난감을 가지고, 동네 만들기 놀이, 음료수 마시기 놀이 등을 하면서 말이다. 컵모양 작은 장난감에 구름을 담아 온 조카 "이모 이거 먹어"하고 건네면, "음~ 여기선 상큼한 맛이 나네"하고 대꾸를 해준다. "예린이도 먹어봐, 어때? 무슨 맛이나?" "음... 하늘색맛" 작은 입으로 제 하고픈 말을 표현하는 작은 조카가 그저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예쁜 시간, 예쁜 아이.
어린 시절엔 정말 아기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명절이 좋았다. 친척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오면 난 아기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바빴는데. 아기의 눈에 띄고 싶어서 괜히 으르렁 소리 내기, 이불 뒤집어쓰고 흐흐거리기, 배 간지럽히기, 과하게 웃는 표정 짓기 등 얼마나 애를 썼던지.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근래엔 통 아이를 볼 기회도 없고, 또 예전만큼 아기를 좋아하는 열망이 크게 일지 않아서 그 감정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친정에서 어린 조카들을 보며 그때의 내가 다시 떠올랐다. '맞아, 난 아이를 참 좋아했지.'
내가 선택한 언어치료사의 길, 아이부터 어른, 노인까지 전부 언어치료 대상자들이다. 그 길에서 더 특화된 분야를 선택 가능하다. 난 아직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에 어느 분야를 내 전문 분야로 삼을지 두리뭉실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많이 봐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래도 언어 발달 과정, 언어 치료 등은 이제 막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카들과의 시간을 보내면서 내 길을 가볼 만하겠다는 확신이 더 들었다. 특히 언어발달 치료 쪽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분야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먼저 친근감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안에는 '놀이'가 주축을 이룬다. 아이들의 눈에 맞춰야 치료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난 어떤 치료사가 될 수 있을까? 아아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아이들의 표현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조카의 빛나는 눈동자, 세상 모든 말을 알고 싶어서 끊임없이 모방을 일삼는 아기.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의 부던한 노력이 그저 감사했다. 그래, 난 그런 네가 좋았어. 너의 순수한 흡수를 사랑했어. 아니, 그냥 너라는 존재를 그대로 좋아했어. 나, 너의 어려움에 도움 한 스푼 줄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런 이모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널 보며 문득 그런 생각, 그런 다짐을 하게 된 이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