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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Sep 02. 2021

블랙아웃

잊음이 나를 보호할까


지이이잉, 지이이잉.

“여보세요.”

회장님, 반장이에요.”

반장님 전화에 잠이 깼다.

“네, 반장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셔? 목소리가 왜 그래? 요즘 무리한다 했더니 몸이 안 좋으신가 보네. 어젯밤에 D블록 쪽 가로등이 여덟 개 나가서 전기 기사를 불렀어요. 제가 가 볼 테니 회장님은 좀 쉬세요.”

“네, 반장님, 감사해요.”

내가 들어도 목소리가 이상했다. 눈이  떠지지 않아 만져보니 눈두덩이가 부었다. 머릿속에서 밀가루 폭탄이 터진  같았다. 머릿속 뇌는 말라비틀어진 스펀지 조각처럼 딱딱해지고  위에 뿌연 먼지가 날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몸은  끊긴 꼭두각시 인형처럼  쳐져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어제저녁 내내 누워 있었지. 그 전에도 자려고 누워 있었는데 잠은 들지 않았고, 전화가 왔었나? 누구랑 통화를 했더라.

머리가 멍해서 전 날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운이 없어 그냥 천장을 바라보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어제저녁을 안 먹었지. 점심은 뭘 먹었더라.

머릿속의 먼지는 가라앉지 않고 머리에서 나온 수분은 모두 눈으로 향한 것 같았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어제 내내 울었어. 남편이 서점으로 나를 데리러 왔었고 둘이 점심을 먹으러 갔어. 그런데 내가 계속 울고 있으니 아무것도 못 먹을 것처럼 보였나 봐. 남편이 콩국수 한 그릇과 감자전을 주문했지. 내 눈이 충혈되어 있으니 국숫집 사장님이 무슨 일이냐 물어보았어. 남편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어. 사장님이 남편 먹을 것 만들면서 좀 더 만들었으니 국물이라도 먹으라며 콩국수를 두 그릇 내오셨어. 그러면서 등을 쓰다듬는 손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또 울었지. 울면서 콩국물은 다 먹었던 것 같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계속 울었지. 난 왜 그렇게 운 걸까.

어릴 때부터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잘하지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한 기억도, 부모님이 다투신 기억도, 심지어 친구들과 함께 간 여행에 대한 기억도 군데군데 비어 있다. 여행에 간 적이 없다고 우기다가 단체 사진에 나온 나를 보며 당황한 적도 있다.

이 정도로 머리가 멍한 적이 없었던 것인지 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근래에 이렇게 힘든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전날의 기억도 모두 지워져 버릴까 봐 머리를 쥐어 짜내었다.

이웃 언니랑 싸웠어. 내가 화가 많이 나서 사람들 앞에서 언성을 높였어.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던  같아. 선생님이 뛰어 오셨고 옆에서 뭐라고 말하니 말리다 말고 가셨는데 사이 사람들이 서점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어. 그런데 얼굴은 안 보이고 형태만 보였어. 나는 서점 천장과 책장 사이 어디쯤을 보고 있었던  같아.

 시간을 넘게 생각을 되짚어 보아도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내가  소리를 지르고 하루 종일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음속에 미움이나 화가 남아있으면  기억이  날 텐데 어떠한 감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좀 움직이다 보면 기억이 날까 싶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다 그대로 쓰러졌다. 어지러웠다. 저녁 한 끼 굶었다고 이렇게 어지러울 일인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원에 나가 있으면 다 좋아질 것 같았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런 식이면 살이 금방 빠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을 챙겨 먹고 정원에 나갔다. 겨우 하루 물을 주지 않았는데 잔디 잎이 길게 접혔다. 꽃도 시들시들해 보였다. 그동안 물을 너무 챙겨서 주었나 보다. 비가 오는 날도 있고 가뭄이 드는 날도 있는 법인데 꼬박꼬박 챙겨 물을 주다 보니 식물들도 그것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견디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다.

데크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반장님이 가로등 보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 대문 앞에 그저께 전지한 사철나무 가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반장님은 대문으로 들어서며  많은 나뭇가지를 어떻게 치울 거냐고 물어보았다.

“형님이 실어가기로 했어요.”

마침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이웃이 트럭을 타고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더니 차를 세우고 우리 집 정원으로 들어왔다.

“지금 은행가는 길인데 다녀와서 치워줄게.”

“네, 다녀오세요.”

내 안색을 좀 살피더니 말이 바뀌었다.

“은행 나중에 가도 되는데, 사철나무 전지 하는 법 가르쳐 줄까? 저렇게 쥐 파먹은 것처럼  잘라 놓으면 어떡해.”

“네, 가르쳐 주세요.”

“집에 가서 장비 좀 들고 올게.”

반장님은 업무를 보러 관리실로 갔고 형님은 장비를 가지러 집에 갔다. 그 사이 강아지 산책을 시키던 이웃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십 분 놀고 가야겠다. 달라가 이모 보더니 같이 놀다 간다고 조르네.”

“놀다 가요. 달라 왔어? 더운데 파라솔 아래 앉아요.”

“나 여기 앉아 보고 싶었는데!”

“커피 줄게. 여기서 마셔요.”

아이스커피를 건네주며 옆 의자에 나도 함께 앉았다.

“이쪽에서 보니 정원이 아늑하네. 여기 참 좋아요.”

“그죠?”

트리머와 노끈을 들고 들어오는 형님도 불러 앉히고 아이스커피를 한 잔 더 내 왔다.

함께 사는 이야기도 하고 마을 이야기도 하다 보니  분은  시간으로 늘었다.  사이  머릿속 먼지들도 천천히 가라앉고 스펀지에 물도  오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멈춰 버렸던 시곗바늘이 다시 돌아가는  같았다.


남쪽 정원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화단에는 장미와 수국이 심겨져 있다


핸드폰을 보니 문자와 카톡이 잔뜩 와 있었다. 대부분 괜찮냐는 내용이었다.

‘어제 그 정신으로 전화랑 카톡을 많이도 했구나.’

 술을 진탕 마시고 주정을 해댄 꼴이었다. 나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데 주저리주저리 많이도 떠들었나 보다. 대학 친구들과의 단톡창을 열었다. 마구 써댄 글이 화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어제의 나는 매우 흥분해 있었다. 배신감과 서운함에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글은 상황 설명이 부족했지만 친구들은 자기들이 싸운 것처럼  편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처음 화가  이유가 생각났다. 하지만  화를 돋운 내용과  감정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내용은 알겠는데 어제의 감정이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분노는 나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전이되어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잊어 나를 보호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괴롭더라도 내가 느꼈던 감정을 모두 기억해 내야 하는 것일까.

“달라야, 이제 가자. 이모 나무 잘라야 된대.”

멍하게 앉아 있다가 간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놀러 와요.”


이런식으로 키를 맞추고 상한 가지와 튀어나온 가지를 자르면 된다


형님은 어느새 노끈으로 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앞으로 많이 튀어나온 나뭇가지도 예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높이가 괜찮냐고 물어보더니 노끈 묶는 법을 설명해 주었다.

“멀리서 보면서 높이를 맞추고 끈 높이에 맞춰서 자르면 돼요. 회장님은 반대쪽부터 잘라요. 나는 이쪽부터 자를게.”

서로 말도 없이 노끈만 보며 키를 맞춰가기 시작했다. 얼추 정리가 다 되자 형님이 말했다.

심란할  ‘일멍 최고지.  은행 갔다  때까지 나뭇가지 정리해서 대문 앞에 쌓아둬요. 내가 싣고 갈게.”


줄 맞추어 자르기 전인데 지금은 더 단정하다


다시 데크에 멍하게 앉아 키 맞춰 정리된 사철나무를 바라보았다. 내 기억도 저렇게 정리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 잘려나간 감정도 함께 실려 가 버려지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날 끝내 전날의 기억과 감정을 완벽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찾아와 준 사람들과 걱정해 준 사람들 덕에 군데군데 빈 기억을 정리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되었다.


열흘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멍하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그날의 기억을 모두 없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등을 만지던 따뜻한 손길과 나의 안색을 살피던 걱정스러운 눈빛이 그날의 분노보다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잊지 않더라도 나를 보호할  있는 방법을 찾을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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