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일기 1
4년 전,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점심 약속이 있어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수다가 길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먼저 집으로 가겠다는 나를 집 근처까지 태워준다며 잡는 바람에 계획했던 시간이 지나 버렸다. 차를 타고 가는 길에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벌써 집에 도착했다고 했다. ‘다섯 시도 안되었는데 벌써 들어왔네. 한 시간 전에 출발했어야 했는데.’ 그때부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집에 들어가니 남편과 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라 하고 저녁 준비를 하는 중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평소에도 마음이 불안하면 숨을 몰아 쉬는 편이었지만 그날은 숨을 아무리 들이쉬어도 폐로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밥을 하다 말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손, 발, 얼굴까지 저리기 시작하더니 앉아도 누워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놀란 남편과 아들이 손과 발을 주물렀다. 아들이 가져다준 빈 봉투에 대고 숨을 쉬어도 더 답답하기만 했다.
두 남자는 알아서 밥을 챙겨 먹고 나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가며 가장 숨쉬기 좋은 방향을 찾아 누웠다. 시간이 지나니 조금 나아졌다. 갑자기 피곤해져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숨쉬기가 훨씬 힘들어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려오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본 남편은 내 손을 끌고 일으켜 세웠다.
“안 되겠다. 응급실 가자.”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과호흡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신체에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과호흡은 간단한 피검사로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정맥에서 하는 보통 채혈과 달리 동맥에서 피를 뽑은 후 산소와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해 이상이 없으면 정신적인 문제인 셈이었다. 몸 깊은 곳에 있는 동맥에 주삿바늘이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니 겁이 났다. 이제 좀 괜찮아졌으니 그냥 집에 가자고 할까 했지만 원인을 아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냥 검사를 받아 보기로 했다.
한밤의 응급실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다. 내 순서를 기다리며 살펴보니 심각한 응급 환자가 치료를 받는 응급실은 따로 있었다. 간호사가 채혈 준비를 하고 나를 불렀다.
“선생님, 저 이제 괜찮은 것 같은데 피 안 뽑으면 안 될까요?”
“오셨으니 뽑으셔야 해요.”
“정맥은 안 무서운데 동맥혈은 처음 뽑아봐요.”
“최대한 안 아프게 뽑아드릴게요.”
엄살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전혀 아프지 않았다. 주삿바늘에 집중하다 보니 숨쉬기도 한결 편해졌다. 피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응급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남편과 과호흡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 응급실에서 여자의 울음 섞인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왜 그랬어?”
남편인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미안해.”
“미안하다면 다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흐느끼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듣고 있는 나의 과호흡도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담당 의사를 불러 응급실 밖에서 기다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불안한 상황에 반응하는 나를 본 의사는 아무래도 심적인 원인인 것 같다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보호자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이 물었다.
“내가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니?”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 가족은 9년 반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2012년에 귀국했다. 아들이 한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입학시기에 맞추어 남편도 한국에 있는 외국계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남편은 3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회사생활을 해보겠다고 했다. 거의 매일 야근과 회식이 있어 자정 즈음에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남편이 약속한 3년은 5년이 되었다. 그동안 아들은 대학 2년을 마치고 군대 복무까지 끝낸 후 3학년으로 복학했다. 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자기 딸을 가르쳐 주면 안 되겠냐는 친구의 부탁을 시작으로 대학 때부터 해오던 과외 수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일주일 중 월, 수, 금 사흘은 수업을 했다. 남편이 자주 일찍 들어오던 화요일과 휴일은 대부분 집에 있었다. 목요일은 나의 유일한 휴일이었다.
수업을 하는 날은 보통 차에서 저녁을 때웠다. 언제부터인가 화요일에도 남편이 늦게 오기 시작하는 바람에 저녁을 혼자 먹는 날이 더 늘었다. 혼자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 구워 먹는 것을 제외한 모든 ‘혼밥’은 다 해보았다. 그나마 목요일에 홍대 앞이나 가로수길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약속이 없으면 혼자 돌아다녔다. 대중교통으로 새로 생긴 카페에 가거나 차를 몰고 춘천이나 강릉에 다녀왔다.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낸 탓인지 갱년기가 가까워 지기 때문인지 우울감이 느껴지는 날이 잦아졌다. 잠도 점점 줄었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 가슴이 너무 답답해 소파에서 자다 새벽에 안방에 들어가 잠이 드는 날도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려 하다 보니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수업을 끝나고 모임에 들렀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나 들어가기도 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했다. 내가 집을 비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혼자 둔 게 미안해 배려해 주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과호흡으로 응급실을 가기 석 달 전쯤이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와 보니 남편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금 몇 시야.”
“오늘 좀 늦었어. 목요일인데 일찍 들어왔어?”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목요일에 일찍 들어온 지 6개월쯤 됐어.”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이렇게 살 거면 우리 그냥 헤어지자. 너 요즘 나랑 같이 자는 것도 싫어하고 내 얼굴 보는 것도 싫어서 늦게 오는 거잖아. 그냥 끝내자.”
남편의 말투는 진지했다. 그동안 혼자서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멍하게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남편은 말을 이어갔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되잖아. 넌 나와 함께 사는 게 싫은 거잖아. 졸혼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었어?”
“졸혼이 뭐야?”
나를 보는 남편의 눈빛이 바뀌었다.
“졸혼 몰라?”
“모르는데.”
“결혼 생활을 정리하는 거지. 너 그 생각으로 매일 늦게 들어온 것 아니었어?”
“월, 수, 금 사흘 일하고 화요일은 하루 종일 집에 있고 목요일 하루 친구 만난 건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휴일은 특별히 보강 없으면 항상 집에 있었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난 5년 동안 거의 매일 혼자 보냈는데 고작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하루 저녁 혼자 있었던 게 그렇게 억울했어? 나는 친구도 못 만나니? 오늘은 좀 늦었지만 보통 10시 전에 들어오잖아. 술을 마시고 늦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런 일로 이혼하자는 말 들어야 해? 자기는 왜 자기 생각만 해?”
쏘아붙이는 내 태도에 남편 말투가 수 그러 들었다.
“그럼 왜 잠은 같이 안 잔 건데?”
“나 2년째 불면증이야. 잠이 안 와. 밤새는 날도 많고 길어야 하루에 서너 시간 자. 그런 건 왜 몰라?”
“내가 싫어서 같이 안 자는 줄 알았어. 그럼 나 혼자 이상하게 생각한 거네.”
“혼자 생각하지 말고 그냥 물어보면 안 돼? 그리고 꼭 술을 마셔야 물어볼 수 있어?”
“오해한 건 미안한데 이제 나 집에 일찍 들어오니까 친구는 낮에 만나면 좋겠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난 나의 최선을 보여주기로 했다. 우선 일을 반으로 줄여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당겼다.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저녁 약속은 모두 취소했다. 남편이 퇴근한 후에는 대부분 집에 있을 수 있도록 내 시간을 조정했다. 나의 노력에 남편은 무척 고마워했다.
“여기 계셨네요.”
의사가 나를 불렀다.
“피검사 결과는 정상입니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요. 혹시 다음에도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신경정신과로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비상약입니다.”
의사는 불투명한 은색 비닐에 싸인 약을 나에게 건넸다.
집에 오는 내내 남편과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숨쉬기는 여전히 힘들었지만 원인을 알고 나니 조금 편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약봉투를 보았다. 빛에 노출시키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화장대 한편에 넣어 두었다가 며칠 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약은 절대 안 먹을 거야.’
하지만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감이 느껴지는 기간도 점점 길어졌다.
그날로부터 약 3년 후인 작년 여름, 고속도로 운전 중 나에겐 그날보다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났다. 남편은 내 손을 잡고 또 병원에 갔다.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 후 내 우울증을 받아들이지 않던 남편의 태도가 바뀌었다. 약 봉투를 버렸던 나도 15개월째 꼬박꼬박 약을 먹고 있다. 아직도 20분 이상 차 타는 것을 힘들어하며 남편이 바라던 대로 집에만 머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