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미잘

4. 자기야, 제발 믿어.

by 매콤한 사탕

막둥이를 겨우 달래고 안방에 들어오니 남편이 정색했다.


“애들이 엄마 하는 대로 똑같이 형한테 너무하잖아.””

“형이 형 형다워야지 말이지.”

“그래도 말미잘 동영상은 별로야.”

“말미잘이 문제야? 공부한다고 하고 게임하는 게 잘하는 짓이야?”

“아니지….”

“게임에 미쳐서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래”

“못하니까 더 그래. 차라리 게임을 하게 놔두면 어때?”

“남편, 진짜 순진하다. 애 대학 못 가면 어쩌려고.”

“중학생이 벌써 무슨 대학 걱정이야.”

“아이고. 세월이 기다려주나?”

“망해도 지금 망하는 게 낫다. 고등학교 가서 폭망하면 대책 없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남편이 진지하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보이다니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예방접종이라 생각해. 사춘기를 잘 보내야 탈이 없지.”

“어쩌려고?”


남편의 의견을 요약하자면 녀석에게 하루에 두 시간씩 게임할 자유를 주자는 것이다. 나는 과연 하루에 단 두 시간으로 게임에 빠진 사춘기 녀석이 만족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집 아들은 게임을 안 했다. 게다가 사춘기라고 성적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말할수록 선배가 미워지려고 해서 나는 사내 도서실로 향했다.


도서실에는 ‘사춘기’에 관한 책들이 꽤 있는데 그중에 마음이 가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사춘기 아들의 마음을 여는 부모 코칭> 책은 너덜너덜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한지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럴 수가, 남편은 옳은 소리를 하는 능력자였다. 청소년 심리전문가가 쓴 그 책에는 사춘기 아들과 민주적으로 상의하여 정해진 시간에만 게임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공부 효율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었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공부하지 말라고 혼내면 더 공부하고 싶어 질까?”

함께 사춘기 육아서를 보던 남편이 무슨 자다가 복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게임하지 말라고 혼내서 더 하고 싶은 거라며?”

남편은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안드로메다에 처음 온 지구인 달래듯 타일렀다.

“자기야. 제발 믿어. 전문가를 못 믿으면 어떡해?”


우리는 사춘기 육아서를 철저히 분석한 부모답게 아들과 민주적 협의 끝에 하루 두 시간 게임할 자유를 부여했다.


남편은 아들이 게임중독에 이르지 않도록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퇴근 후 아들과 게임을 했다. 남편과 녀석은 눈에 띄게 사이가 좋아졌다. 남편은 녀석과 두 시간 게임을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의 영웅 간의 상성 관계와 및 정글 동선, 갱 루트 등을 연구하고 게임리그를 챙겨보며 전략을 구상했다.


그것은 확실히 남편에게 더 긍정적이었다. 인공 인대 수술 후 운동을 못하는 남편은 동네 친구들과 술자리로 헛헛한 마음을 달랜 덕에 과체중과 지방간이 생겼다. 반면, 문제의 녀석은 저녁 먹고 아빠와 게임 두 시간을 달린 다음 녹초가 되어 공부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책을 쓴 사람이 전문가가 맞나 의심하며 다시 그 책을 독파했다. 이런 치명적인 실수가! 게임 후 공부가 아니라 공부 후 게임을 하는 전략이 맞는 거였다. 당장 나는 룰을 수정했다.


“공부 안 하면 게임 못 할 줄 알아!”

“합의한 거 아니었어? 왜 또 그래”

“과학적으로 그래. 공부 먼저 게임 나중.”

“뭐???”


남편은 거칠게 항의했다. 이것은 명백한 게임중독 증상이다.


나는 절대 아들 넷 엄마는 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남편에게 그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게임은 생각보다 두뇌를 많이 쓰는 터라 게임에 열중한 후 공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남편은 내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받아들이기 싫어했다.


“자기야. 제발 믿어. 전문가를 못 믿으면 어떡해?”


나는 남편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마지막 아군인 아빠를 잃은 녀석은 아마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녀석의 마음 따윈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나대로 아들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해 하루도 빠짐없이 문제집을 채점하고 오답 노트를 검사했다. 녀석은 이른 아침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엄마가 정한 분량의 공부를 마치고 게임을 한 뒤 쓰러지듯 잠에 빠졌다.


군말 없이 엄마가 짜준 계획표대로 열심히 사는 아들을 보며 나는 드디어 사춘기가 지나갔구나 싶어 홀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몇 개월 후면 고등학생이 된다. 이 중요한 시기를 알차게 보내야만 대학에 갈 수 있다.


이왕이면 좋은 대학에 가면 좋겠다. 이대로 가면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

말미잘 같던 녀석이 내가 알던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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