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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민낯

별별 사람들 6화

by 매콤한 사탕

고령화사회로 본의 아니게 청년이라고 규정된 불혹이 훌쩍 넘은 젊은이가 말했다.*


"자세히 보려면 얼굴을 찡그리게 돼요. 주름살이 생길까 걱정이에요."


도서관에서 일하는 젊은이는 최근 노안이 생겼다고 했다. 아무리 나라가 청년이라고 우겨도 세월은 비껴나가지 못했다.


젊은이의 노안은 특이하게도,

일종의 후천성 안면인식장애를 유발했다.


좋게 보자면 젊은이는 이 증상으로 인해 전보다 사람들을 아름답다고 느꼈다.

얼굴의 잡티, 흉터, 주름살 같은 것들이 블러처리한 듯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장점은 치명적인 단점이 됐다.

눈썰미 좋던 젊은이는 개개인의 독특한 인상이나 표정을 읽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약해진 시력에 난시까지 겹치자 그녀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든 특징 없이 비슷하게 보였다.


젊은이가 노인의 민낯을 본 것은 순전히 이런 특이점 때문이었다.


"그분은 어른이라기보다 그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예상치 못한 뼈 있는 말에 내가 놀라자 불혹이 넘은 젊은이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렇다고 나는 뭐 어른이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나이만 먹었다고 다 어른인가요?


그 노인은 늘 찡그린 표정이었다. 입술은 흉하게 삐쭉거렸고, 두꺼운 안경을 코끝까지 내려쓰고 안경너머 성난 눈을 한껏 치켜떴다. 늘 누구든 어디 한번 걸리기만 해 봐라 하고 벼르는 눈빛이었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자리다툼이 생겼다. 맡아놓은 자리를 빼앗겼다며 항의하는 이용자를 진정시키려고 직원 셋이 총동원되었다.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나니 그 노인이 끼어들었다.


"여기 직원들이 문제야! 니들이 하는 게 뭐 있어? 내가 낸 세금이나 축내는 썩어빠진 것들!"


다툼의 당사자들이 다 떠났지만 노인은 점점 고무되었다. 그가 기다리고 고대하던 D day였던 것이다.

누구든 어디 한번 걸리기만 해 봐라.
내 가만 안 둬! 그렇고 말고!
내 본 떼를 보여주마! 옳거니!


노인은 혼자가 뭐에 납득이 되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직원들을 나무랐다.


그 도서관은 사기업이 운영해 노인이 낸 세금이 들지 않았지만 노인에게 그런 사실이 중요할리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노인은 매일 도서관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짐없이 감시의 눈을 부라리며 직원들을 압박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이용자들은 도서관에 책을 보러 왔다. 하지만 노인은 책을 읽지 않았다.

어디 걸리기만 해 봐라. 이것들 내 가만 안 둬!

무슨 말을 해도 자신에게 찍 소리 못하는 직원들은 그 노인의 먹잇감이었다.


계속된 난동에 급기야 직원들은 그 노인을 슬금슬금 피했고 끼어들만한 여지없이 행동했다.


어느 순간, 노인은 도서관에서 사라졌다.


불혹의 젊은이가 다시 그 노인을 만난 건 노안이 생긴 어느 날이었다.

젊은이는 그 인상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정체를 떠올리기엔 눈앞이 희미했다.

노인은 대출할 책을 건네줬다.

책은 총 세 권이었다.

노안이 생긴 젊은이는 책을 바짝 눈앞으로 당겨 제목을 확인했다.


< 우울증 남자의 30시간 > <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 < 우울한 마음도 습관입니다 >


젊은이는 우울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 어디서
측은지심이 발동했는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상대를 위로하고 싶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희끄무레한 얼굴을 보며 그녀는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어르신, 대출기간은 10일이에요. 한번 연장 가능한데 해드릴까요?"

"세권이나 되는데 무겁지 않으실까요?"

"가방 주세요. 제가 넣어드릴게요."

"조심히 가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네. 고... 고맙습니다."


수줍은 상대의 목소리가 들러왔다. 노인이 떠나고 직원 하나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분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직원으로부터 노인의 정체를 알고 젊은이는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도서관에 오시면 꼭 저한테 오세요."


무섭지 않냐고 내가 묻자 젊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달라졌어요. 그분이 변한 것도 있고 내가 변한 것도 있고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막무간이던 분이 나이 들고 철이 드시는 건지 더 걱정이 되더라고요. 무슨 사정인진 모르지만 괴로우신 것 같아요."


하지만 그분도 알아야죠.
나이 많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니까.
나도 그렇고요.
어른이 되려면 노력해야죠.


이야기를 하는 내내,
불혹이 넘은 젊은이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내게 고집스레 존댓말을 썼다.


*최근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시 도봉구에서도 청년 기준을 만 19~45세로 상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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