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말미잘! 너로 정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 받는 대가란 무시무시한 법이다. 녀석을 혼쭐 내면서 오래된 영화가 떠올랐다.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 주연의 데블스 에드버킷. 악마역을 맡은 알 파치노의 어설픈 붉은 눈빛 CG. 섬뜩하지만 왠지 우스꽝스러운 이 녀석의 눈빛과 닮았다.
“하나도 안 풀었네. 미친 거야?”
나는 새것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깨끗한 문제집을 찢어질 듯 넘기며 소리쳤다. 참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엄마, 그래도 동생들 챙기고 청소도 했어요….”
“아이고 기특해라. 엄마 생각해서 동생 돌보고 청소하고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임을 야무지게 했구나?”
“죄송해요.”
“이 점수가 말이 돼? 너 미쳤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행평가 점수가 괜찮아서 B는 나올 거고 2학기 때 열심히 해서 만회하면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개놈의 자식아! 너 미쳤어? 이 병신 같은 새끼”
속사포 랩처럼 욕이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벌렁벌렁 널뛰었다. 40년 넘게 살며 몰랐던 숨은 재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욕을 참 찰지게 잘하는 능력자였다.
“엄마! 욕하지 마세요!”
뒤돌아보니 초등학교 2학년 막둥이가 선비 얼굴을 하고 나를 나무랐다.
“엄마가 욕하면 나쁜 사람 이랬으면서….”
“미안해. 엄마가 너무 속상해서. 형아 시험 점수가 엉망이야.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했나 봐.”
“맞아요. 형, 주말에 하루 종일 게임 했어요.”
중학교 1학년 둘째까지 자기 방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야! 넌 끼어들지 마!”
녀석은 둘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지랄하고 있네. 뭘 잘했다고 동생한테 성질이야!”
“엄마!!! 지금 또 욕했어요. 형아가 잘못한 건 맞지만 어린이 앞에서 욕하는 건 아니죠!!!”
나는 천사 같은 막둥이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 엄마가 잘못했어. 욕하면 안 되는데 참을 수가 없네.”
“야! 서민준. 엄마가 언제 욕하는 거 본 적 있어? 지금 빼고 없잖아? 형이 오죽하면 엄마가 욕하겠어. 너 생각해 봐. 내일 받아쓰기 시험인데 공부 안 하고 게임하는 게 맞아?”
“아니지. 난 큰 형아처럼 게임 안 하고 공부해. 난 받아쓰기 백 점 맞는 멋진 남자잖아. 그렇죠. 엄마?”
나는 천사 같은 막둥이에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가 막둥이의 귀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귀염둥이 잠깐 듣지 말자. 엄마 욕해요! 우리 안 들은 걸로 할게요.”
당연히 여기서 멈춰야 했다. 아이들 말처럼 나는 이전에는 욕하지 않는 모범적인 어른이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모범답안은 ‘아니야. 아무리 화가 나도 욕한 건 잘못이지. 그러면 안 되는 거지. 엄마가 미안하다. 얘들아.’였다. 하지만 인생을 교과서처럼 살 순 없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너희 귀 꽉 막고 있어! 이 개 놈의 자식아! 정신 차리고 공부해! 어서!”
“엄마!!!”
괜찮다던 둘째가 빽 소리쳤다.
“왜 욕하라며?”
“다른 욕으로 해요. 그거 개 비하 발언이잖아요. 개가 무슨 잘못이에요.”
“맞아요. 강아지가 얼마나 귀여운데.”
아뿔싸, 개는 건드는 게 아닌데. 귀여운 강아지는 꼭 지키고야 말겠다는 막둥이의 결연한 표정을 보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온몸에서 화가 빠져나가려는 찰나,
“어머니. 제가 생각해도 개놈의 자식은 정말 아닌 거 같아요.”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을 문제의 녀석이 거들고 나섰다. 어쭈 이 녀석들 봐라. 아주 애견인 납시었네. 하지만 내가 키운 자식답게 논리적이다.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바보? 병신?”
“실망이에요. 그거 장애인 비하 발언인 거 알죠? 진짜 아니거든요.”
그때, 나는 내 양육법이 유연성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욕하면 나쁜 사람이라니! 살다 보면 욕지기 나는 상황이 얼마나 많은데 욕 한번 시원하게 날리고 뒤끝 없이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야 맞는 거였다. 이런 바보 똥개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상황이라니!
“말미잘로 하자!”
“엄마, 말미잘은 하등 동물 비하 발언인데.”
“그냥 말미잘로 해!”
내 사전에 더는 물러날 욕이 없다.
말미잘, 자포동물에게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나는 가족 구성원들과 민주적 절차에 따라 긴 협의 끝에 괴테가 질풍노도의 시기로 명명한 지랄발광 사춘기 절정의 녀석에게 내뱉을 욕으로 말미잘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