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주 4.5일제, 왜 모두가 환영하지 못하는가

by 머스

“더 적게 일하고, 더 잘 살자.” 말만 들으면 반박하기 어려운 구호다. 근로시간은 줄고 삶의 질은 높아진다니, 어찌 반대할 수 있을까. 정부가 주 4.5일제를 공식 의제로 꺼내자 시민사회는 환호했고, 일부 기업은 시범사업에 참여했으며, 언론은 ‘변화의 신호탄’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쯤에서 물어야 한다. 우리가 맞이하는 건 정말 ‘변화’인가, 아니면 '확신 없는 실험'인가.


“한국은 너무 오래 일한다.” 주 4.5일제를 지지하는 이들은 말한다. 실제 OECD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72시간으로, 회원국 평균보다 약 200시간 길다. 이 수치를 근거로, 과로 사회를 벗어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통계에는 한 줄짜리 단서가 붙는다. "국가 간 비교에 유의해야 하며, 집계 방식과 기준이 국가마다 다르다."


독일(1331시간), 일본(1617시간), 미국(1796시간), 호주(1680시간).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재고, 그 안에 포함되는 노동의 질도 다르다. 숫자는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 자체로 명확한 논리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계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단순히 ‘덜 일하자’는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시간을 쏟았지만, 성과도 만족도도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단순한 노동시간이 아니라 ‘일의 질’과 ‘삶의 구조’에 있다.


주 4.5일제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보스턴대 연구가 있다. 2025년 7월 발표된 이 실험은 전 세계 61개 기업을 대상으로 주 4일제를 시도한 결과, 평균 근로시간은 줄고, 직무 만족도는 높아졌으며, 이직률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간호직군에서 친절도가 올라가고, 입사경쟁률이 치솟았다는 국내 사례도 있다. 이런 결과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특히 '사람을 소모하지 않고도, 시스템을 다르게 짜면 효율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누구도 “일을 줄이면 안 된다”라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그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다.


독일이 짧은 노동시간에도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단순히 국민성이 달라서가 아니다. 사적인 통화조차 제한되는 사무실,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는 관공서, 회의와 보고를 최소화한 업무 문화 등, '덜 일하고도 성과를 내는 구조'가 선행되어 있다.


한국은 여전히 야근이 습관이고, 회의가 결정을 지연시키며, 보고가 보고를 낳는 조직문화를 탈피하지 못했다. '짧게 일하고도 효율적인 나라'를 닮고 싶다면, 그 나라가 쌓아온 제도와 습관부터 닮아야 한다. 시간만 줄이고, 구조는 그대로 둔다면, 우리는 덜 일하고 덜 효율적인 나라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의 현실은 이상과 괴리가 크다. 2023년 기준, 300인 미만 기업의 외국인 고용 비중은 97.3%에 이른다. 숙련도가 낮고, 노동 강도가 높은 산업 구조 속에서, 단순히 ‘근무일이 준다’는 것은 곧 생산성 하락과 납기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정부는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제”를 말하지만, 대기업이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중소기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흐른다. 대기업은 도입한다. 그리고 협력업체에 시간이 아닌 결과만 요구한다. 한쪽은 금요일 오후를 쉰다. 다른 한쪽은 그 시간까지 전부 납품을 마쳐야 한다. 단축이 아니라, 전가다. 변화가 아니라, 전가다. 정부가 말하는 ‘단축’은 달콤해 보이지만, 현장의 감각은 다르다. “시킨 일은 그대로인데, 시간이 줄었다. 그런데 돈도 그대로 받으란다.”


주 4.5일제가 지금 당장 전면 시행되기엔 준비된 것이 없다. (1) 성과 평가 시스템, (2) 유연한 조직 구조, (3) 중소기업 대상 보완 장치, (4) 산업별 차등 도입 로드맵. 이 네 가지 없이 들어서는 ‘단축’은, 균형이 없는 한쪽 기울기의 건축물에 가깝다.


“그래도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변화는 언제나 선도 집단이 이끈다. 하지만 제도가 되기 위해선, 그 이음새가 사회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계해야 한다. 몇몇 기업의 실험이 아니라, 모두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어야 제도다.


우리는 더 적게 일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모두가 함께 갈 수 있는 구조를 갖췄는지를 물어야 한다. 선진국처럼 짧게 일하려면, 선진국처럼 치밀하게 설계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중소기업은 오늘 하루도 버겁다. 비정규직은 오늘이 유일한 기회다. 그들에게 주 4.5일제는 ‘선택’이 아니라 ‘소외’일 수 있다.


변화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변화가 조급하게 도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준비 없는 선언은 누군가에겐 약속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부담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 줄짜리 구호가 아니라, 설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