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음으로 기억을 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기억을 다루는 방식

by 프렌치 북스토어

많은 사람들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대표작 『연인(L’Amant)』의 첫 문장을 떠올린다.


Un jour, j’étais âgée déjà, dans le hall d’un lieu public, un homme est venu vers moi.
어느 날, 한 공공장소의 홀에서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이미 나이가 든 뒤였다.


늙어버린 얼굴, 낯선 남자의 시선, 그리고 한 장의 잊히지 않는 이미지를 동시에 불러내는 소설의 첫 문장은 말하지 못한, 어쩌면 말하지 않았던 과거를 기억해 내는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식민지에서의 경험, 여성의 몸과 욕망을 거침없이 표현하면서도, 정작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멈춰 서서, 말을 아끼고, 길고 깊은 침묵을 남긴다.


그녀의 작품 중간에는 이어져야 할 설명이 나오지 않고, 문장이 덜컥 끊기는 지점들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은 빠져 있는 이야기. 이러한 의도적인 침묵은 뒤라스 문학을 특징짓는 기억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프루스트가 기억을 따라 문장을 늘려가는 작가였다면, 뒤라스는 기억이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을 그대로 남겨두는 작가이다.


그리고 그녀는 회상할 수 없음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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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은 흔히 자전적 연애담으로 소개되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기억의 균열로 짜인 자전적 실험으로 해석한다.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의 어린 시절, 식민지 인도차이나에서의 가난한 삶, 중국인 남자와의 관계, 가족의 폭력과 파괴를 회상하는 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회상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장면, 늙은 뒤의 모습, 사랑의 장면이 제멋대로 떠오르는 과정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속 화자는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지금 나는 늙었고, 글을 쓰고 있다"라는 문장을 끼워 넣는다. 떠올랐던 기억은 멈추고, 현재로 돌아오는 문장들이 흐름을 끊어 놓는다.


이런 비선형적 움직임은 트라우마적 기억의 실제 작동 방식을 반영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일수록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고, 반복해서 현재를 침범하는 기억의 특징을 작품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끊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서술의 인칭



작품에서 화자는 '나(je)'라고 하기도 하고, '그녀(elle)'라고 자신을 타자화해서 부르기도 한다. 나와 그녀 사이를 오가는 인칭의 변화는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품지 못하는 자아 분열을 드러낸다.


주어가 바뀌는 거리 두기는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 자신조차 낯설게 느끼는 '과거의 나'를 '그녀'라고 부르면서 현재의 나와의 이질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일수록 묘사는 간결하다.


일반적으로 첫 경험, 가족의 폭력, 감정의 폭발과 같이 드라마틱할 것이라 예상하는 순간에서 뒤라스는 놀라울 만큼 담담함을 유지한다. 대부분의 작가라면 장면을 늘이고, 감정을 고조시키고, 순간을 몰입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건의 무게를 표현하지만, 뒤라스는 오히려 감정을 덜어내고 서술의 숨결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을 한다.


보여주지 않는다.
흔적만을 남길뿐이다.


그녀는 하나의 장면을 온전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흔적만을 남기는 방식으로 기억을 회상한다. 마치 문장의 끝에서 갑자기 조명이 꺼진 듯, 결정적인 순간, 문장은 끊기고, 사건은 배경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다른 기억으로 미끄러지듯 넘어가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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