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이전의 기억

나탈리 사로트의 '트로피즘'이라는 미세한 진동

by 프렌치 북스토어

프랑스 작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는 그녀만의 독특한 기억의 형식을 제시했다. 이전에 기억을 다룬 두 작가들과는 다르게, 사로트는 아예 이야기 이전, 말 이전, 의식 이전의 순간에 집중했다.


그녀가 트로피즘(Tropisme)이라고 부른 이 개념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미세한 움직임, 의식이 언어로 포착하기 직전의 진동을 기록한 문학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트로피즘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물도 없다. 사로트는 때로 이름조차 없는 얼굴 없는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그들이 겪는 건 거대한 감정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심리적 떨림이다. 눈빛이 스쳐 지나갈 때 생기는 미묘한 불편함, 누군가의 말끝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적의, 좌석을 바꾸려다 마음을 접는 순간의 찔림 같은 것이다.


사로트가 이 아주 작은 것조차 기억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인생을 생각할 때 기억하는 건 거대한 사건들뿐이 아니다. 사소한 감정, 미세한 감각, 작은 느낌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조용히 축적되고, 결국 삶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은 너무 작아서 언어가 닿지 못할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사로트의 대표작 『트로피즘(Tropismes)』은 (국내에는 『향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 내면의 미세한 떨림을 관찰하는 현미경의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총 24개의 짧은 텍스트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각 챕터에는 대중에게 익숙한 의미의 이야기는 없다.


이름이 없는 어떤 사람들이 뚜렷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환도 없는 텍스트들 뿐이다.


첫 번째 텍스트의 도입부는 이 책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사방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약간 축축하고 미지근 한 공기 속에서 피어나, 그들은 가만히 흘러 다녔다. 마치 벽 들에서, 철책에 싸인 나무들에서, 벤치들에서. 더러운 보도를 에서, 공원들에서 스며 나온 듯이.


정체 모를 그들이 공기 속의 눅눅한 따뜻함 속에서 여기저기서 솟아오르고, 벽과 나무와 벤치에서 스며 나와 천천히 흘러내리는 장면.


그냥 단순히 사람들로, 어쩌면 감정의 덩어리이고, 동시에 누군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이자 사회 전체에 번지는 집단적 분위기로도 해석된다.


사로트가 그들을 트로피즘이라고 부른 이유는 바로 이런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트로피즘이 도대체 기억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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