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몸에 새겨지는 계급

『Madelaine avant l’aube』이 말하는 원래 그렇다의 의미

by 프렌치 북스토어

아침이 아직 골목 바닥까지 다 내려오지 않은 시간에 동네 빵집을 찾았다. 문을 열자마자 버터 냄새가 따뜻한 공기와 함께 밀려 나왔다. 갓 구운 바게트에서 나는 고소한 향기, 초콜릿이 들어간 비에누아즈리의 단내가 아직 덜 깬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빵집에 들어갔을 때, 한 중년 남자는 주문을 하고 있었다. 깔끔한 듯 엉클어진 머리, 낡은 옷차림은 이 공간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가 빵을 고르는 속도는 놀랍도록 익숙하고 빨랐다. 그는 "Bonjour(봉쥬르)" 한 마디를 가볍게 날렸고, 그다음 문장들은 숨 쉬듯 이어졌다.


"Comme d’habitude. Et… vous me mettez aussi deux pains au chocolat."

"평소처럼요. 그리고 오늘은 빵 오 쇼콜라도 두 개 주세요"


그는 "주세요"라고 했지만 목소리에는 부탁의 공손함은 없었다.


바게트와 주문한 빵이 종이봉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점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봉투를 받아 들고 사라졌다.


다음으로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그래서 더 눈에 띄는 남자의 차례였다. 그는 패딩을 턱까지 올리고 손은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듯했다.


"Bonjour(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점원 앞에 선 그의 시선은 진열된 빵들 위를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Euh... pardon... Est-ce que je peux prendre... une baguette?""아... 죄송합니다... 바게트 하나... 주시겠어요?"


점원은 "Bien sûr(물론이죠)"라고 대답하고, 능숙하게 봉투를 집어 바게트를 넣었다.


그리고 그는 1유로 40을 정확하게 맞춰서 점원에게 주었다. 그리고 바게트가 든 봉투를 들고 빵집을 걸어 나갔다.





『새벽녘의 마들렌(Madelaine avant l’aube)』


상드린 콜레트(Sandrine Collette)의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배경이나 줄거리는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그 이야기 속의 감각은 오늘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서 말한다. 규칙이나 제도라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페이 아리에르(Pays Arrière)라는 단절된 세계를 만들어내 차별이 틀이 되어버린 사회를 만들어냈다.


그곳의 사람들은 바실리크(Basilic)라는 초록빛 강을 경계로 사실상 단절되어 살아간다. 강을 건너는 일은 오직 노파 뱃사공 앙시엔느(Ancienne)의 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가난과 추위가 규칙처럼 반복되는 환경에 오래도록 생활한 듯 보인다. 농사를 짓고, 날짐승을 피해 생활하고 있지만, 먹을 것은 늘 부족하다.


부족함에 익숙해진 사람들. 배고픔조차 원래 그런 것이 되어버린 듯한 마을의 분위기는 묘하게 디스토피아스럽다.


마을에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한다. 표지판처럼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대신 사람들이 숨 쉬는 방식, 눈을 피하는 타이밍, "예"라고 말하는 속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이곳에서는 주인들(les maîtres)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앙브루아지(Ambroisie)라는 성을 소유한 이들이다. 그들은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냥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떠들면서 등장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반대로 구(gueux, 거지)라고 불리는 계급이 있다. 같은 하늘을 공유하지만, 그 하늘을 보는 자세가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지만, 자기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다. 주인들이 가져가고 남는 것으로 그들의 삶은 유지된다.


구에게는 사냥이 금지되어 있다. 숲에도 들어갈 수 없다. 배고픔은 일상이 되고 나서부터 사람들은 내일을 계획하지 않게 되었다. 계획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하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들에게 계획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잔인한 건, 이런 위계적 질서라 꼭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단계에서는 그 아래를 지배했다. 큰 농부가 일꾼을 몰아붙이고, 장인이 견습생을 다루고, 부모가 아이에게 명령하는 식이었다. 위에서 받은 무게는 아래로 흘러가고, 아래에서는 그 무게를 다시 더 아래로 내려보내는 식으로 겨우 균형을 맞추구 있었다.


그곳의 누구도 이러한 질서에 맞서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강한 사람, 그리고 오래 산 사람이 늘 옳다고 믿는 편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각 단계는 그 아래 단계를 그렇게 지배한다. 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큰 농부들은 자기 일꾼들을 개처럼 다루고, 장인들은 견습들을 몽둥이로 길들이며, 부모는 죽을 때까지 아이들을 부린다. 누구도 맞서지 않는다. 더 강한 자, 더 나이 많은 자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삶은 '그게 옳은가'를 묻지 않은 채 사슬처럼 이어진다. 더욱이 '더 나은 길이 있었는가'를 질문하지도 않는다.
더 나은 길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설령 그게 우리에게 관심사가 되었어도 말이다.

가끔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불공정한 세상을 그저 유지하는 편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보다 낫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가진 건 가진 것이다. 비록 그것이 보잘것없다 해도. 사람은 언제나 잃을 게 있다. 그게 삶 그 자체일지라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붕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운이 좋은 편이기 때문이다.

『새벽녘의 마들렌』 중에서...



이 공동체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몸으로 직접 익혀야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노하우, 배고픔을 티 내지 않는 표정, 억울함을 삼키는 말투, 먼저 사과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특히 아이들은 버릇이 좋다는 칭찬으로 그 연습을 대신했다. 말 잘 듣고, 조용하고, 참을 줄 아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불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주변의 숲에서 마들렌이라는 아이가 나타나게 된다. 말투도 몸짓도 사회에 길들지 않은, 거의 야생에 가까운 아이였다.


사람들은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못한다. 아이는 그들의 공동체에 들어온 순간부터 배분 방식, 서열, 규칙에서 예외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들렌의 등장으로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규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말을 할 수 있는지, 누가 먼저 웃을 수 있는지, 누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하는지 같은, 너무 익숙해서 그동안 규칙인 줄도 몰랐던 것들에 의문이 생겨났다.


마을은 아이를 돌보고 길들이려 한다. 하지만 그 돌본다는 의미는 따뜻한 보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에게는 침묵과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생을 인내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도 포함됐다.


특히, 작품에서는 질서를 지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 말이 나오면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하던 말을 멈추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마들렌이 던진 질문들은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왜 참아야 하는지? 왜 당연한 건지? 왜 누군가는 늘 미안해해야 하는지? 같은 물음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이 생겨나자 마을의 실체는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작품은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하지만 소설 속 계급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학벌이나 직업, 경제력 같은 범위에 것이 아니다. 조건적인 불평등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마치 어떤 삶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결정된 것처럼 계급과 불평등과 차별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고풍스러운 건물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 한다. 말이 많아도 위험하고, 말이 적어도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전한 만큼만 말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아예 말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소설 속에서는 음식을 배분하고, 먹는 장면에서 이러한 태생적 잔인함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음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마을의 서열을 설명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먹을지, 누가 끝부분을 가져갈지, 누가 남은 음식을 먹어 치울지 같이 사소한 규칙들이 음식 배분을 늘 공정해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 바로 그 공정해 보임이 때로는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된다고 말한다. "원래 이렇게 해 왔어",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우리도 다 같이 기다리고 있잖아", "그건 규칙에 맞지 않아" 같은 말들로 폭력을 공정함으로 포장한다.


이러한 말들은 무척이나 폭력적이다. 사람들은 전통, 규칙, 질서, 상식, 매너, 합법, 절차 같은 단어들로 이러한 잔인함을 포장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정해 보이는 규칙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 규칙 안에서 포근함을 느낀다.


작품이 더 섬뜩한 이유는 그 안락함이 단지 몇 가지 규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번 규칙에 길들여지면 사람들은 기존의 규칙을 유지하기 사람들을 압박한다. 자신들의 질서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이렇게 한번 받아들여진 상태는 방향성을 잃기 쉽다. 가끔은 서로를 향하는 방식으로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모두를 위해, 원래 규칙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니까라는 이유로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 한다. 그리고 결국,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단속하기 시작한다.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고 말해야 할까?


소설이 끈질기게 보여주는 건, 그 착한 아이라는 칭찬이 종종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너무 자주 질서 위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말 잘 듣는 아이를 칭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