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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렌치 북스토어 Oct 14. 2024

사랑이 기술이 되면...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

혹은
사랑은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는,
다시 말하면
행운만 있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즐거운 감정인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이렇게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책과 함께한 독서 경험이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사랑이 기술의 한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곤혹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전제로 이어가는 그의 논리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 과정도 돈을 내고 배운다. 사랑을 만들고 그 감정을 유지하는 방법과 손해보지 않는 연애를 하는 노하우까지. 사랑하는 방법까지도 누군가로부터 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애처롭게 다가올 때가 많다. 그냥 마음껏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는 이유의 중심에는 사랑과 권력이라는 연인 사이의 관계적 역학이 자리 잡고 있다. 즐거움으로써의 감정적 교류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랑이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쾌락이든, 취집이든, 혹은 그 이상의 복잡한 이 유이 든 간에 말이다. 사랑이 기술이 되었기 때문에 배우는지, 아니면 사랑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기술이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변화는 주변에 ‘사랑의 기술’을 능숙 능란하게 다루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사실과 그들을 경계하는 이들도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를 더 붙이자면 또 그들의 사랑이 점점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


사랑이 기술의 범주 안에 들어가면서 사랑은 더 이상 순수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관계에서 우열을 정의하고, 감정을 이용해서 타인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써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유쾌하지 않은 스토리는 두 세기도 더 전에 이미 프랑스 문학에 등장했다.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Pierre Choderlos de Laclos)의 소설《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1782)》는 사랑의 기술의 파멸을 그린다.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위험한 관계》, 프랑스어, published by MAGNARD




18세기에 출판된 이 소설은 당시의 프랑스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벌써 200년도 더 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소설은 아직까지도 다양한 시대적 배경과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2022년에 NETFLIX에서 동명의 작품으로 재해석되어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에는 『스캔들』과 2012년에는 『위험한 관계』 등으로 소개되었던 이력이 있다.




넷플릭스의 『Les Liaisons dangereuses, 2022』(왼쪽)과 영화 『위험한 관계, 2012』(오른쪽)




소설은 사랑과 권력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다룬다. 사랑을 감정적 교류로 경험하기보다는, 타인을 조종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목적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최고의 기술자와 그들을 둘러싼 유혹과 사랑이 자리한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복수를 계획한다. 하지만 복수의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계획은 흐트러지고 결국 자멸하게 된다.


작중의 메르테유와 발몽은 쾌락과 복수를 목적으로 위험한 유희적 계약을 맺는다. 메르테유는 자신의 옛 애인이었던 제르쿠르에게 버림받은 사실에 분노하고, 젊고 아름다운 그의 새로운 약혼녀인 세실을 타락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민다. 그녀의 복수에는 사랑의 기술자 발몽이 있다. 그는 사랑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인물이다. 그는 어떠한 이성이라도 자신의 침대에 눕힐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장기판 위에 말처럼 메르테유의 계획, 자신의 쾌락에 따라 움직이다.


메르테유는 그에게 세실을 유혹해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발몽은 결혼한 여성인 마담 투르벨을 유혹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젊고 사교계 경험이 없는 세실은 자신에게는 너무 쉬운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메르테유는 모종의 계약으로 세실의 복수는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발몽은 마담 투르벨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녀의 희생적인 사랑은 발몽을 변화시킨다. 이후 상황은 계획했던 것과는 점점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하고, 결국 모두 자멸하고 만다.





Le Verrou(빗장), Fragonard(프라고나르) Jean-Honoré, 1777년




 아직 우리에게도 진실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았듯, 18세기 프랑스 사교계에도 진실한 사랑은 있었다. 몰리에르의 『멋진 연인들(Les Amants Magnifiques)』이나 마리보의 『사랑과 우연의 장난(Le Jeu de l'amour et du hasard)』 같은 희곡들을 보면 신분과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린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과 권력, 관계 속에서의 역학은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는 무척이나 이중성을 띄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우아함과 교양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슴 뛰고 손끝이 짜릿한 쾌락을 갈망했다. 품격 있고 정갈한 사교계의 이면에는 음모, 유혹, 질투, 경쟁,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랑을 권력의 도구로서 사용될 만큼 그들은 찌들고 메말라 있었다.



귀족 사회에서의 사랑,

진정성 vs 도구화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의 사랑은 개인의 감정적 차원 이상으로 여겨졌다. 누구와 사랑을 하고 관계를 맺는 과정이 사회적 신분과 개인적 명성에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조건, 경제적 상황, 가문 중심의 정략적 계약 등이 일반적이었다. 사랑이란 곧 가문 간의 결합을 의미했다. 정치적 동맹이나 경제적 거래 정도로 남녀 간의 사랑은 정의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유혹하고, 사랑(?)하고, 또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돈을 주고 '사랑의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순진하면 당하는 사교 왕국에서 메르테유와 발몽 같이 기술적으로 정점에 있던 인물들은 아마도 무척이나 좋은 딜에 성공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도 얻었을지 모른다. 위선으로 가득한 사회적 규범을 이용해 일부에서는 사랑을 권력 게임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연극 『Les Liaisons dangereuses』,Théâtre de la Ville, Paris, 2016




소설에서 등장하는 메르테유와 발몽 또한 단순한 우정이나 연인 이상의 관계를 보인다.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의 역학성을 겨루는데, 마치 쾌락의 극한을 맛본 사람들의 수싸움처럼 무척이나 첨예하다. 그들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적 계약을 맺는다. 메르테유는 발몽에게 쾌락이라는 보상으로, 또 발몽은 메르테유의 복수를 목적으로.


이 둘의 행동을 보면, 자신의 매력을 무척이나 잘 활용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심을 흔드는 매력을 가진 발몽과 여성성을 활용하는 메르테유의 행동을 보면 사랑의 기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특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을 감장적 무기로 삼는 면모는 무척이나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철저히 이성적으로 자신의 욕망과 목적 달성에 충실한 사랑이라니.




나는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을 때
비꼬지 않아
더 나은 걸 하지
복수를 해.

Quand j'ai à me plaindre de quelqu'un,
je ne persifle pas,
je fais mieux,
je me venge.

Madame de Merteuil





위험한 관계에서 메르테유를 연기한 글렌 클로즈(Glenn Close), 1988년



메르테유는 작중에서 무척 교활하고 인물로 그려진다. 전략적이고 감정적으로 타인을 조종하는 그녀는 감정적 정복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적 우월감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와의 사랑도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이용한다. 권력의 도구 써의 사랑은 목표를 이루려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러한 냉혹함은 철저한 계획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소설이 전쟁이야기였다면 그녀는 영웅처럼 그려졌을 수도.


기대적 상황을 살펴본다면 사랑을 단순한 감정적 교감정도로 간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여성으로서의 자율성과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처럼 사랑을 활용했다. 여성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무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서적 사랑이든, 육체적 사랑이든.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최고의 무기로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원하는 남자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이러한 강력함은 그들 위에서 군림하기에 충분했다.





메르테유와 세실, 『위험한 관계』, 1988년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감정이 이성의 틈 사이로 빠져나오는 순간, 그 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다. 그녀의 냉혹함 또한 사랑에 대한 복수심이라는 감정 앞에서  무너지게 된다. 자신을 버리고 젊은 세실과 결혼을 결심한 제르쿠르에게 질투심에 앙갚음을 위해 벌인 뜨거운 분노가 그녀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다.


연인에게조차 우위에 서야 했다. 자기 의지대로 관계하고, 또 풀어나가야 관계가 지속되었다. 감정적으로 우위에 서 있었어야 했고, 또 그렇게 흘러가야 했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경우에는 자신을 보호하기에서 수월하다.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또 속내를 들킬 가능성도 더 적다. 동시에 상처를 주기도 쉽다. 또 타락시키기도.


실제로 그녀는 누군가를 타락시키고자 했다. 그 타락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이러한 시도가 처음이었는지, 아니면 과거에도 비슷한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만만하고 능숙했다. 실제로 계획은 거의 성공에 이르는 듯 보였다. 세실은 타락했고, 마담 투르벨의 마음은 발몽에게 넘어가지 않았는가?! 물론 예상치 못한 진실한 사랑이라는 덜미에 패배하고 말지만, 상대방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파괴적이었다. 비록 그녀 자신도 게임 속에 매몰되어 희생자가 되어버렸지만, 이 과정 속에서 타인의 감정을 어떻게 조종하고 사랑과 권력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투르벨과 발몽, 『위험한 관계』, 1988년




메르테유와 함께 쾌락을 위해서 행동하는 이가 바로, 발몽이다. 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는 쾌락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그저 정복하고 지배하는 놀이 정도로 여긴다. 그의 목적은 분명하다. 분명하기에 단순하다. 즐거움, 즉 쾌락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사랑을 수단화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발몽에게 '과연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가 느낀 감정이 사랑이었을까? 마담 투르벨의 희생적 행동에 죄책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의 연민이었을 수도 있다.





발몽의 죽음, 소설 속 삽화, 1820년, 런던




자신을 유혹자이자 정복자로 정의한 그였다.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마담 투르벨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그의 차가운 욕정을 자신의 진실한 사랑으로 바꿀 줄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여성들을 유혹하고, 마음을 얻고, 버려는 나쁜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최소한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진 말았어야 했다. 마치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하는 사랑만큼 뜨겁지만 아픈 사랑은 없으니.


그녀의 시도는 발몽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는 그 감정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지진 않는다. 발몽이 느끼는 감정이 진실한 사랑인지, 또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더욱이 진실한 사랑은 상대방의 희생과 애틋함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그저 일말의 양심의 가책정도가 더 가까울 듯싶다. 발몽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끊어내지 못한다. 투르벨과의 관계는 발몽의 배신으로 끝이 났다. 




투르벨의 죽음, 소설 속 삼화, 1796년



소설의 끝은 파멸이었다.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계산된 계획의 결과는 모두에게 불행했다. 연인 사이에 역학적 관계 또한 비슷할 거라고 본다. 사랑에서 우위를 논하는 것만큼 치사하고 냉혹한 순간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가 더 아깝고, 누구 집안이 더 좋고, 조건이 어떻고, 나에게 어떻게 해주는 식의 논리가 정작 사랑하는 둘 사이에는 아무런 영양하가 없다. 만약 자신이 좋은 딜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관계는 분명  상대방의 희생을 먹고 유지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사랑과 권력 사이에는 언제나 이중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우위에 선다. 혹자는 침대에서조차 자신이 위에 있어야 더 짜릿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우월한 입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연애의 테크닉에 열광하고, 밀고 당기기를 기술처럼 설명하고, 간을 보거나 반대로 상대방을 소유하려 든다. 





위험한 관계



누구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다. 그리고는 앞으로 덜 아픈 사랑을 하겠다 다짐한다. 나는 이 말이 상대방의 우위에 서겠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다. 상처받지 않을 만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필요한 만큼 주고 준 것보다는 조금 더 받아내겠다는 식으로 들린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관을 줄여서,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 정의한다. 마치 상대방보다 덜 사랑하는 것이 손해보지 않는 방법인양 말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모두가 희생자일 수밖에 밖에 없다.




언제나 나만 희생자였을까? 



우리 사회에는 희생자가 유독 많다. 관계를 맺힘으로써 모두가 무언가는 포기하고, 내어주고, 또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다. 도대체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길래? 헌신적인 희생? 나만을 위한 사랑? 끊임없는 노력? 언제나 나만 희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존재할 수 없음에도.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라는 제목 자체에서 알 수 있듯, 우위에 설 수 있는 관계는 위험하다. 사랑에서 자신이 더 누릴 수 있다는 계산적 논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과 함께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 끝은 언제나 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메르테유나 발몽처럼 차가워도, 세실이나 마담 투르벨처럼 너무 뜨거워도 위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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