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사랑과 짝을 이루는 단어가 있다면 무엇일까? 사랑을 가장 잘 묘사한 형용사가 설렘이라면, 사랑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권태라는 생각이 든다. 시작이 열정이었다면, 그 끝은 인내가 아닐까? 사랑은 기쁨과 열정, 고통과 상실을 동시에 담고 있는 다면적인 감정이지만,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 생로병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언제나 익숙함이 있다. 권태기, 관계에서 더는 가슴이 뛰지 않게 되었을 때, 그리고 어쩌면 이 익숙한 시간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위험에 빠진다.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원제 : Les Petits Chevaux de Tarquinia) 은 이러한 사랑의 권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은 한여름의 고요한 이탈리아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권태로운 일상을 공유하는 두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뒤라스는 이 작품에서 사랑을 이상적이고 영원한 감정보다는 인간의 결핍과 갈망, 그리고 고독이라는 다소 어두운 맥락 속에서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 지나간 뒤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뒤라스는 사랑의 고요함과 불안, 그리고 그것이 인간에게 가지는 필연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소설 속 사랑은 표면적으로는 조용하고 너무나도 평온하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속에는 권태, 갈망, 그리고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고통이 깃들어 있다. 소설은 이탈리아의 한적한 해변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등장인물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기대하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조차 그들은 관계의 답답함과 무력감을 떨쳐내지 못할 만큼 그들의 사랑은 권태롭다.
이야기는 두 부부인 사라와 자크, 그리고 지나와 롤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들 사이의 사랑은 열정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라와 자크는 오래된 부부로, 서로의 존재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둘의 관계는 활기를 잃고 무력해진 상태이다. 그들의 대화는 피상적이고, 감정적으로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피상적인 관계만을 이어가고 있다. 지나와 롤랑의 관계 역시 사랑보다는 무기력과 권태로 가득 차 있다. 지나의 내면에는 새로운 사랑과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지만, 롤랑과의 관계에서 그 욕망은 실현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중이다.
소설 속 사랑은 단순히 행복과 열정을 제공하는 감정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희열이 넘쳐흐르던 사랑은 때로는 혹은 결국 고독과 갈등을 동반하는 이중적인 속성을 갖는다. 이러한 사랑의 모순적인 본질은 관계를 더욱 다각적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사랑은 때로 사람들을 움직이지조차 못하게 만든다. 너무 황홀해서 혹은 너무 무기력해서. 소설 속 인물들은 사랑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다. 그들의 갈망은 종종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렇게 풀리지 않는 욕망은 일상적인 권태와 밀접하게 얽혀 있다. 관계 속에서 상대방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기대하지만, 그 기대는 종종 채워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라와 자크도 서로에게 더 이상 신선한 자극을 주지 못하는 관계가 유지되면서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서로의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속 일탈을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무기력과 갈망의 공존은 사랑이 항상 마음속 결핍과 함께한다는 속성을 이야기한다.
l'amour et l'ennui
사랑과 권태는 대립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관계 안에서 공존하는 감정에 가깝다. 서로에게 권태로움을 느끼는 소설 속 인물들은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정으로만 유지되던 사랑이 일상 속에 스며들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일 것이다. 권태 속에서도 떠날 수 없는 인물들의 모습은 사랑이 단순히 로맨스나 흥미로움으로는 정의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 이상의 정서적 안정과 존재에 기반한 사랑으로의 변태가 시작되는 시기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랑과 권태는 인간을 친밀하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고립시키는 성질을 가진다. 관계 속에서 상대방과 함께 있음에도,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은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극복하고 싶지만 극복할 수 없는 상태, 이 역설적인 사랑의 속성은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만들면서도, 개인의 정체성과 외로움을 가장 처절하게 드러내는 순간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속성은 소설 속 사라와 자크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에게 깊이 연결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와 롤랑 역시 그들의 관계에서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처럼 사랑은 친밀함과 거리감, 안정과 불안을 동시에 제공하는 감정이다. 마치 정의될 수 없는 존재 같이.
우리는 쉽게 10대 때는 설레는 사랑, 20대 때는 열정적인 사랑, 30대 때는 현실적인 사랑, 40대 때는 인내하는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 사랑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의 모습은 시기별로 다르지만 대부분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동시에 상대방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이중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사랑은 단순히 기쁨이나 말랑말랑한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우리 내면의 결핍과 그 결핍으로 인한 서로를 향한 갈망으로 거리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 공백을 메우겠다고 열을 내면 사랑이 힘들어지고, 그대로 놔두면 더는 의미가 없는 관계처럼 멀게 느껴지게 된다. 그렇다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에게 의지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그 기대는 충족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등장하듯 사랑은 완벽한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결핍을 드러내고, 그 결핍 속에서 관계를 통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수단에 더 가깝다. 이러한 불완전함이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꿈꿔야 할까? 사랑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고독, 그리고 작은 순간에서 느끼는 익숙함이야말로 사랑의 진정한 모습일 수 있다.
10대는 가슴 뛰는 사랑을 하고, 20대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30대는 현실적인 사랑을 하고, 40대는 인내하는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 지금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 당신이 하고 있는 사랑은 당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불만을 만을 만들고 있는가?
사랑이 권태로워 힘이 든다면 사랑의 본질에 무척이나 가까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권태로움이 우리의 사랑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고, 또 그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끔은 더 멀어지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사랑과 권태가 붙어 있는 시간, 그 권태로움은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거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