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브 공작부인》 by 마담 드 라 파예트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살아온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 Il faut vivre comme on pense, sinon tôt ou tard on finit par penser comme on a vécu. »
프랑스 작가 폴 부르제(Paul Bourget)는 그의 소설 《정오의 악마(Le démon de midi)》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문장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그 앞에 등장하는 문장, "그러나 거기에는 투쟁이 필요할 것입니다(Mais il y faudra une lutte)"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삶을 살기 위해 내면의 갈등과 외부의 압력에 맞서야 함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종종 우리는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현실적 이익을 위해 양심을 속이거나,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편리함을 위해 일회용품을 사용하는 것처럼, 신념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때로는 타협이 아니라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우리는 신념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에 따라 사고를 조정하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주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17세기 프랑스 궁정을 배경으로 하는 마담 드 라파예트(Madame de La Fayette)의 《클레브 공작부인(La Princesse de Clèves)》은 바로 이러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은 16세기 중반, 프랑스 왕 앙리 2세(1547~1559)의 궁정을 배경으로 하지만,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루이 14세(1643~1715)가 절대왕정을 구축한 17세기 후반이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시대적 배경의 문제를 넘어, 소설이 당시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읽혔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6세기 프랑스 궁정은 르네상스적 이상과 강력한 귀족 문화를 바탕으로 연애와 정치가 밀접하게 얽힌 공간이었다. 궁정 내에서는 화려한 연회와 무도회가 열렸고, 귀족들의 결혼과 연애는 단순한 사적 관계가 아니라 가문 간의 정치적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샤르트르(클레브 공작부인)는 사랑과 의무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한편, 이 작품이 발표된 루이 14세 시대는 절대왕정이 정점에 다다른 시기였다. 루이 14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며 귀족들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여 귀족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16세기 궁정에서 개인적인 연애 감정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과 달리, 17세기 궁정은 더욱 엄격한 의례와 도덕적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은 루이 14세 시대에 팽배했던 궁정의 위선과 억압된 감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작품 속 인물들의 내면적 갈등은 17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가 당면한 현실을 반영하며, 도덕적 규범과 개인적 감정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앙리 2세 시대와 루이 14세 시대를 비교해 보면, 프랑스 궁정 문화는 연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16세기 궁정에서 연애와 정치가 얽혀 있던 모습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17세기에는 더욱 세련되고 규율화된 형태로 발전했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정 문화를 엄격한 예절과 상징체계로 재편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운영되었고, 왕의 총애를 얻는 것이 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 따라서 사랑과 결혼은 개인적인 감정보다 가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었으며, 궁정 내의 연애는 철저한 규율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은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명예와 도덕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강조되었던 ‘덕성’(vertu)과 ‘자제력’(retenue)이라는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 당시 귀족 사회의 이상적 여성상을 그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소설은 1558년 헨리 2세의 통치 마지막 해의 궁정에서 시작한다. 궁정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왕자와 공주들이 우아함과 용맹함을 겨루고 있는 중이다. 이때 궁정으로 정숙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은 샤르트르(Mademoiselle de Chartres)가 들어온다. 그녀의 어머니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샤르트르 부인(Madame de Chartres)은 자신의 딸의 혼사감을 찾는 중이다. 샤르트르가 사교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날, 그녀는 부유한 클레브 왕자로부터 청혼을 받게 된다.
결혼 후 클레브 공작부인이 된 샤르트르는 로렌 공작과 클로드 왕비의 약혼식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샤르트르는 그 파티에서 느무르 공작과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어머니는 불행한 운명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다. 한동안 병을 앓던 샤르트르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샤르트르에게 느무르 공작과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충고한다. 느무르 공작과의 관계는 그녀의 남편 클레브 공작의 신뢰와 믿음, 그리고 그녀 자신의 명성에도 악영향을 끼칠 거라 경고한다. 샤르트르는 그 말을 듣고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시골의 클레브 공작의 자택에서 지내고 있던 샤르트르는 남편의 요청으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느무르 공작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느무르 공작이 영국 왕위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샤르트르는 자신이 아직 느무르 공작을 향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던 샤르트르는 파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클레브 공작의 권유로 그녀는 파리에 더 머물기로 결정한다.
어느 날 샤르트르의 눈앞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훔치는 느무르 공작을 발견한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던 그녀였지만, 느무르 공작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열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순간, 그를 향한 감정은 불타오르게 된다. 느무르 공작의 과감한 사랑의 고백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던 샤르트르는 결국 침묵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느무르 공작은 샤르트르가 자신의 행동을 목격했음에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느무르 공작이 왕실 마상 시합 중에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샤르트르는 느무르 공작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난 후 샤르트르는 도핀 부인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전달받게 된다. 도핀 부인은 그 편지가 느무르 공작의 주머니에서 떨어졌다고 알려준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샤르트르는 이 사실을 듣고 질투심에 휩싸이게 된다.
샤르트르의 삼촌이자 느무르 공작의 절친한 친구인 비담도 이 편지의 존재에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샤르트르의 손에 들어간 편지는 사실 비담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편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비담은 느무르 공작에게 도핀 부인을 찾아가 그 편지가 느무르 공작 자신의 것이라고 변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느무르 공작은 샤르트르가 자신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비담의 부탁을 거절한다. 오해를 풀기 위해 느무르 공작은 샤르트르를 찾아가 편지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린다. 그 편지는 비담에게 전해지기로 되어 있었고, 그 편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부탁한다. 하지만 편지는 이미 도핀 부인에게로 돌려준 뒤였기 때문에 느무르 공작과 샤르트르는 편지를 다시 작성하기로 한다.
샤르트르는 느무르 공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남편인 클레브 공작에게 파리 떠나겠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자신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는다. 이 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느무르 공작은 클레브 공작부인이 사랑에 빠진 대상이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얼마 후 사고로 앙리 2세가 서거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새로운 왕 프랑수와 2세가 즉위를 하게 된다. 클레브 공작은 왕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랭스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샤르트르는 자신의 의지대로 시골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왕 즉위식에 샤르트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느무르 공작은 그녀를 보기 위해 그녀의 시골집을 찾아갈 구실을 만들어 낸다. 느무르 공작을 의심하고 있던 클레브 공작은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시종에게 느무르 공작을 감시할 것을 명령한다. 샤르트르가 머물고 있는 시골집을 찾은 느무르 공작은 샤르트르를 만나기 위해 시도하지만 그녀는 만남을 거부한다. 하지만 셋째 날 느무르 공작은 결국 여동생과 함께 샤르트르를 찾아 만나게 된다.
시종은 모든 사실을 클레브 공작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시종은 느무르 공작이 샤르트르와 이틀 밤을 함께 보냈을 수도 있다고 보고한다. 이 사실을 듣게 된 클레브 공작은 분노하고 열병에 시달리게 된다. 열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샤르트르는 클레브 공작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하지만 클레브 공작은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남편의 죽음 이후, 샤르트르는 모든 이들과의 만남을 거부한 채 고독한 일상을 보내게 된다. 비담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만나게 된 느무르 공작과 샤르트르는 마침내 둘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이러한 둘의 고백이 소용없을 거라고 말한다. 샤르트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따르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샤르트르는 남편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고통을 달래기 위해 피레네 산맥 근처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지만 몇 년 후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프랑스 궁정은 단순한 정치의 중심지 이상으로 다양한 역할을 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은 화려한 문화와 치열한 권력 다툼이 공존하는 무대로 유명했다. 특히 연애와 스캔들은 궁정 사회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 귀족들의 사랑 이야기는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6세기 앙리 2세 궁정에서는 국왕과 귀족들 사이에서 복잡한 연애 관계가 얽혀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왕 앙리 2세와 그의 정부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의 관계는 제법 유명하다. 디안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궁정 내 권력 균형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궁정 연애는 단순한 감정적 교류를 넘어, 신분 상승과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클레브 공작부인》에서도 이러한 궁정 사랑의 이중적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느무르 공작은 매력적이고 유능한 귀족이지만, 궁정의 연애 게임에 능숙한 인물처럼 묘사된다. 그는 샤르트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감정이 순수한 사랑인지, 아니면 궁정에서의 관계 형성 전략인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16~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연애가 개인의 감정을 넘어 정치적, 사회적 요소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궁정 생활은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가 꽃피웠지만, 그 안에는 엄격한 도덕규범과 위선이 존재했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궁정 내 모든 행동이 왕의 눈에 의해 통제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형식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통제적 규율은 감정을 숨기고, 공식적인 도덕성을 지키는 것이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만들었다.
소설은 이러한 궁정 문화의 위선이 뚜렷이 그리고 있다. 샤르트르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의무에 따라 행동하려 한다. 그녀가 느무르 공작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그와 맺어지기를 거부하는 것 또한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궁정 문화 속에서 요구되는 여성의 도덕성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정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갈등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는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가 강조했던 ‘덕성’(vertu)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궁정에서 연애는 허용되었지만, 도덕적 위반은 철저히 처벌받았다. 여성에게만 유독 강조되었던 도덕적 잣대는 당시 여성을 구속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결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지키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제도에 더 가까웠다. 특히 귀족 여성에게 결혼은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가문의 이익을 고려한 계약에 가까웠다. 부모와 친족들은 정치적 연대를 강화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신중하게 혼처를 정했으며, 당사자의 감정보다 가문 간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소설에서 샤르트르 또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클레브 공작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에게 존경과 애정을 품지만, 진정한 사랑은 느끼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당대의 도덕적 가치관에 따라, 사랑보다는 의무와 명예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다. 어쩌면 당시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통해 겪었던 현실적인 고민일지도 모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7세기 프랑스에서 결혼은 여성들에게 개인적 행복을 보장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결혼한 여성들은 남편의 보호 아래 생활해야 했으며, 가정 내에서 순종적인 역할을 강요받기 일쑤였다.
당시 여성의 순결과 명예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된다고 여겨졌다. 귀족 여성들은 결혼 전 정숙해야 했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규범이 강요되었다. 소설에서 샤르트르는 느무르 공작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녀가 끝내 사랑을 포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남편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도덕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선택은 당시 귀족 여성들이 감정과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겪었던 갈등을 잘 보여준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불륜이 엄격하게 처벌받았다. 그녀들은 명예를 잃은 여성은 사회적으로 매장되거나 심각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다. 반면, 남성 귀족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정부를 둘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이러한 이중적 윤리관은 당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제약 속에서 살아야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귀족 여성들에게 강한 사회적 제약이 있었지만, 17세기 후반에는 여성들의 지적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살롱(Salon) 문화는 여성들이 문학과 철학을 논하고, 지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살롱에서는 남성 지식인들과 여성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은 프레시아즈(Précieuses)라 불리며 문학과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마담 드 라파예트 역시 이러한 살롱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문학적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다.
비록 여성들의 삶은 법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일부 귀족 여성들은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교육과 문학적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지적 영역을 넓혀 나갔다. 특히 17세기 후반에는 여성들의 지적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살롱(Salon) 문화는 여성들이 지식과 문학을 공유하고, 당대의 중요한 사상과 철학을 논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은 여성 작가들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담 드 라파예트 역시 이러한 지적 흐름 속에서 문학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교육 기회는 대부분 남성들에게 주어졌다. 반면 여성들은 기본적인 교육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 여성들은 일반 평민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일부는 문학과 철학,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기도 했다.
여성 교육의 핵심 목적은 단순한 학문적 탐구가 아니라, 예절과 덕목을 익혀 남성에게 좋은 아내가 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주로 종교, 교양, 예절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 기본적으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지만, 문학적 창작보다는 편지를 쓰거나 예절을 갖춘 글을 작성하는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을 중심으로, 여성들에게 순결과 순종이 강조되었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의 외국어를 배우기도 했으며, 이는 궁정에서 교류를 할 때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 외에도, 세련됨과 교양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로 피아노, 류트 등의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등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왕과 귀족들 앞에서 품위를 유지하는 법, 대화의 기술, 무도회에서의 행동 방식 등이 교육되었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는 과학, 철학, 수학과 같은 학문적인 분야는 거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역할은 여전히 가정을 돌보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남성과 대등한 학문적 논의를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비록 여성들이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제한적이었지만, 살롱(Salon)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공간을 통해 지적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살롱은 귀족 여성들이 주최하는 사교 모임으로, 문학과 예술, 철학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제약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사상과 문학을 접할 수 있었다.
살롱 문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마담 드 랑부이에르(Madame de Rambouillet, 1588-1665)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살롱은 프랑스 궁정의 사교 문화를 대체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녀의 살롱에서는 프랑스어의 세련된 사용과 문학적 감각을 강조했고, 여성들이 지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는 다르게 마담 드 스퀴데리(Madame de Scudéry, 1607-1701)의 살롱은 문학과 철학적 대화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주로 프레시아즈(Précieuses, 세련된 여성들)라는 지적 여성 그룹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니농 드 랑클로(Ninon de l’Enclos, 1620-1705)가 운영했던 살롱은 문학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립과 자유로운 연애를 주장한 살롱 운영자였다. 당대 남성 지식인들과 대등한 토론을 벌이며, 여성의 지적 능력이 결혼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살롱 문화는 여성 작가들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담 드 라파예트 역시 살롱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고, 작품을 출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여성 작가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어려운 사회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다. 그녀의 작품은 살롱에서 토론되고 평가받았지만, 여성의 문학적 창작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심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담고 있었다. 소설은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국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심리적 갈등은 당시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문학적 전통을 열었다.
소설은 샤르트르의 내면적 갈등과 사회적 규범의 충돌을 심도 있게 보여준다. 특히 여성의 도덕성과 명예를 철저히 요구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무척이나 현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문을 위한 정략결혼, 사랑보다는 의무가 우선인 결혼 생활, 그 앞에 찾아온 사랑은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당대의 사회적 가치와 윤리적 딜레마를 탐구하는 문학적 실험임을 보여준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귀족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가문의 명예를 유지해야 했지만,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는 행동을 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레브 공작부인》의 결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네무르 공작과 맺어지지 않기로 결심하고, 세속적인 삶을 떠나 고독한 삶을 선택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순응이 아니라, 당시 여성으로서 취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자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샤르트르의 선택은 단순히 사회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갈등 속에서 스스로 도덕적 선택을 내림으로써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여성의 주체적인 결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17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들은 철저히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였다. 당시 사회는 가부장제(patriarcat)를 기반으로 운영되었고, 여성과 아이들은 가장의 권위 아래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받았다. 남성이 가족과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필수 요소로 여겨졌다. 이에 반해 여성의 역할은 이를 보조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 같은 지배 구조는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맥락에서도 정당화되었다. 남성이 가정을 지배하는 모습은 신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과 동일하게 해석되었으며,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구조와도 연결되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결혼은 사랑이 아닌 가문 간의 계약에 가까웠다. 귀족 여성들은 부모의 결정에 따라 정략적으로 결혼해야 했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했다. 결혼 계약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신랑과 신부의 의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으며, 양가 부모의 합의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결혼 후 여성의 역할은 철저히 가정에 국한되었다. 여성은 집안의 살림을 맡아 남편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돕고, 자녀 교육과 집안 살림을 책임졌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남편에게 의존해야 했으며, 자신의 재산 관리 권한조차 없었다. 심지어 부유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결혼 후에는 남편이 재산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여성은 남편이 제공하는 생활비 안에서 소비해야 했다.
또한, 여성들은 또한 임신과 출산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현대적인 의료 기술이 부족했던 당시, 많은 여성들은 출산 중 사망했다. "임신한 여성은 한 발을 무덤에 담그고 있다(Femme grosse a un pied dans la fosse)"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출산은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피임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연속적인 임신과 출산을 감당해야 했고, 이는 여성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은 종교적, 사회적으로도 부정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성은 본질적으로 유혹적인 존재로 간주되었으며, 성경에서 이브가 원죄를 초래한 것처럼, 여성은 도덕적으로 남성을 타락시키는 위험 요소로 인식되었다.
당시 마녀사냥 역시 여성에 대한 억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7세기 초반, 유럽 전역에서 마녀재판이 기승을 부렸으며, 여성들은 미신적인 신념과 가부장제적 질서 속에서 희생되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같은 국가에 비해 마녀사냥이 덜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마법과 사악한 힘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어 처벌받았다.
이와 같은 여성 혐오는 문학과 예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예를 들어, 당대의 문학 작품들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여성들이 남성을 지배하는 사회를 묘사한 풍자적 삽화에서는, 여성의 권력 장악이 단순한 사회적 불균형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과 ‘종교적 죄악’으로 묘사되었다.
비록 대다수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았지만, 일부 귀족 여성들은 살롱(Salon) 문화를 통해 지적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문학과 철학을 논하는 살롱이 활성화되었으며, 특히 귀족 여성들이 이를 주도했다. 마담 드 랑부이에르(Madame de Rambouillet)와 마담 드 스퀴데리(Madame de Scudéry)가 대표적인 살롱의 운영자였고, 이들은 프랑스 문학과 철학 담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또한, 여성 작가들도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담 드 라파예트 이외에도, 마담 드 세비녜(Madame de Sévigné), 마들렌 드 스퀴데리(Madeleine de Scudéry), 마담 다울누아(Madame d'Aulnoy)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여성의 감정과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남겼으며, 여성의 지적 능력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작가들은 익명으로 출판하거나 남성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해야 하는 등 제약이 많았다.
17세기의 여성들은 공적인 정치 권력을 가질 수 없었지만, 일부 귀족 여성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몽팡시에 공녀(Anne-Marie-Louise d'Orléans, duchesse de Montpensier) 같은 경우에는 17세기 중반 프롱드의 난(Fronde, 1648~1653) 동안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으며, 왕권에 맞서 싸웠다. 또한, 루이 14세의 비밀 결혼 상대였던 마담 드 맹트농(Madame de Maintenon)은 교육과 종교 개혁에 깊이 관여하며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들의 정치적 참여는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대다수 여성들은 여전히 가정 내 역할에 제한되어 있었다. 여성의 정치적 참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성의 후원을 받아야 했으며, 공식적인 권력보다는 비공식적인 조언자나 중재자의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귀족 여성들은 집안일과 자녀 교육에 집중했지만, 하층민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농촌 여성들은 농업과 가축을 돌보았으며, 도시 여성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팔거나 재봉, 세탁, 요리 등의 노동을 했다. 하지만 여성의 노동은 대부분 공식적인 경제 활동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저임금 또는 무급 노동으로 취급되었다.
특히 과부나 독신 여성들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여성들은 상인으로 활동하거나, 하층민 여성들은 하녀, 바느질사, 식료품 판매업 등에 종사했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았고,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은 사회적 위협 요소로 간주되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여성들은 가정과 사회, 종교적 틀 속에서 남성의 지배를 받았으며, 독립적인 삶을 선택할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혼은 여성의 필수적인 삶의 일부였으며, 출산과 가사 노동이 여성의 주요 역할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일부 귀족 여성들은 살롱 문화와 문학을 통해 지적인 자유를 추구했으며, 일부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