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도서관과 역사 기록관 서기

진시황, 한나라, 사마천으로 이어지는 중국 고대 도서관

by 프렌치 북스토어

지식의 수집과 보존은 지중해 세계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대의 도서관을 떠올릴 때 흔히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이집트의 파피루스, 알렉산드리아의 두루마리를 먼저 생각하지만, 같은 시기 동양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기록 문화와 지식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의 기원은 상나라 시대(기원전 16세기~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국가의 중요한 문서들은 주로 사관과 점술가의 손에 의해 정리되고 보관되었다. 이들이 다룬 문서는 법령집, 족보, 제사 의례 기록, 행정 문서 등 통치에 필수적인 정보들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기록 자체가 왕조의 정당성과 행정의 연속성을 뒷받침하는 도구처럼 쓰였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의 기록 문화가 다른 고대 문명들과는 사뭇 다른 궤적을 따라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무역과 경제 활동 중심의 실용적 목적, 학문과 문화의 확산을 위한 도서관을 세웠다면, 중국은 지식 자체를 국가를 통치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기록 보관의 방식에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당시의 문서 보관은 대중과는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는데, 국가가(= 왕이) 지식의 주체이자 수혜자였고, 그 권한을 독점했다. 당시 텍스트는 왕을 위해서 모으고, 왕에 대해서 기록하고, 또 왕의 말을 전달하는 기능을 했기 그 자체로써 의미보다는 기록을 남기는 행위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록은 곧 통치의 연장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중국에서는 기록의 정확성과 연속성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황실의 명령, 왕조의 사건, 의례와 정치 결정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문서화되었기 때문에 기록에 대한 정확성은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 시대 사관의 독립성이 전반적으로 지켜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오래된 맥락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불태워지고 찾아온
책의 황금기


기록이 정치와 밀접하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위기도 정치적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이 기록의 문화가, 가장 극적인 위기를 맞은 것은 진나라 시기였다.


분서갱유(焚書坑儒),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법치라는 진나라의 통치 사상을 강화하는데 과거(주나라) 시대의 통치 사상이었던 유가 사상은 걸림돌이었다. 진시황은 이를 억압하기 위해 전국에 대대적으로 유학자를 탄압하고, 관련 서적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책은 불태워졌고, 과거 유학자들은 땅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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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와 지식, 그리고 책의 황금기는 모든 것이 불태워진 후에 찾아왔다.


불길 속에서도 모든 지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책 중에서도 시, 의학, 점술, 농업, 역사 자료 같은 일부 실용적인 문헌들은 황실 도서관에 보존하도록 했다.


짧았던 암흑의 시기가 지나고 이어서 등장한 한나라는 황실 도서관에 남겨진 문화적 유산을 토대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흔히 중국 문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이유는 과거 잃어버린 고전과 사상의 복원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진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원 작업은 단순한 문화적 복구에서 끝나지 않고, 한층 발전된 문화가 꽃피울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서기들은 흩어진 고문헌을 수집하고, 손상된 텍스트를 복원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특히 유가 경전의 정리와 표준화를 중점적으로 진행했다. 이렇게 복원된 경전들은 기원전 124년, 한 무제에 의해 설립된 국립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유학생들의 학습 교재가 되었다.


1세기 무렵에는 600여 종에 이르는 책들이 황실 도서관에 복원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기록물은 주로 목간이나 죽간에 작성되었어야 했기 때문에 보관된 자료들은 목록 관리와 더불어 보존 작업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한 책의 관리는 서기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서기들의 업무는 105년에 채륜이 종이를 발명한 이후 더욱 폭넓어졌다. 종이는 훨씬 가볍고 책을 관리하게 용이했다. 종이의 등장으로 분류와 저장, 유통이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정치 한가운데에 서기


진나라와 한나라를 거치면서 지식은 국가를 통치하고 역사를 설계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권력을 정당화시키고 통치 체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핵심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황실 도서관은 국가 이념을 수립하고 전파하는 지적 기반의 전초기지 같은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을 생산하는 이들이 바로 서기들이었다.


실제로 당시 기록된 지식들은 대부분 법률과 행정과 밀접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때문에 이를 가까이에서 다루는 서기의 업무와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겹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이 철저히 군주 권위에 종속된 구조 속에서, 책과 그 안에 기록된 지식을 관리하는 서기들은 국가 권력의 일부로 기능할 수 있었다. 왕의 행적을 기록하는 기술자가 아닌 왕권을 뒷받침하는 실무 관료의 성격이 더욱 부각되었다.


당시 서기의 중요성은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자격요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서기들은 기본적으로 법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행정 처리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고전 문헌에 대한 식견이 기본 요건이었다.


단순한 필사 기술이나 암기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시경』, 『서경』, 『춘추』, 『역경』, 『예기』와 같은 오경(五經)을 비롯해서 유가 고전은 물론, 도가, 병법서, 법가 문헌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경전을 숙지해야 했다. 문자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과거 문체, 고문(古文)과 현재 문체, 금문(今文)에 모두 익숙해야 했다. 또한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문자가 달랐기 때문에 지역의 필체와 문헌 체계를 해독하기 위한 지식이 필요했다.


이렇게 서기의 위상은 점차 변화했다. 과거 기록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직에서 점차 황실의 엘리트 관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에는 학자들과도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행정가이자 학자, 때로는 역사를 기록하는 이, 그리고 정책 자문의 역할을 복합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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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역사학자라고 불리는 사마천(기원전 135년~기원전 86년)은 이러한 체제 속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서기였다. 그는 황실에서 태사공(太史公)의 직위를 맡아, 왕의 공식 기록에 직접 참여하고, 과거 기록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역사를 눈으로 읽는 것을 넘어, 기록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확인하고 조사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사기(史記)』였다.


그는 단순히 기록의 진위를 따지는 것에서 끝내지 않았다. 진실을 남겨야 한다는 신념은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그는 황실의 연대기뿐만 아니라, 온갖 공식 문서를 검토하고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권력자를 위한 기록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역사로 확장시키고 싶었다.


무려 130편에 달하는 이 방대한 역사서는 단지 왕의 업적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천자(天子)의 계보만을 쓰지 않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충신, 불우한 시인, 이름 없는 백성의 이야기를 함께 기록했다. 그 안에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권력에 의해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도 함께 기록되었다.


실제로 『사기』는 독특한 서술 방식을 갖고 있다. 시간의 흐름대로 사건을 배열하는 ‘본기’, 왕후나 제후의 일대기를 담은 ‘세가’, 주요 인물에 대한 개별 기록인 ‘열전’, 제도나 문화에 관한 ‘서(書)’, 지역별 역사를 담은 ‘표’로 나뉘어 구성되었는데, 연대기와 역사 속 개인의 삶을 기록한 인문학적 시각이 공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어떤 사건을 기록하는 것에서 삶의 진실을 문서로 남기는 일을 시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는 궁정의 공식 기록물이 아닌, 민간에서 필사되고 읽히면서 살아남아 전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시도는 기록을 국가 권력의 도구로만 삼았던 기존 체제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기도 했다.




※ 이미지 정보

1. 분서갱유

2. 사마천과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