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무세이온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인류 최초 거대 도서관이 이야기

by 프렌치 북스토어

기록의 문명에서 이집트를 빼놓을 수는 없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거대한 무덤과 신전을 남긴 이 땅에서, 기원전 4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e)에서 그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지식을 모으고 해석하는 장소를 꿈꾸었다. 그 꿈은 곧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다.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의 지성 중심지인 무세이온(Museion)의 일부로 설립되었다. 무세이온은 그리스어로 뮤즈의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뮤즈의 장소는 요즘으로 치면 대학과 박물관, 연구기관이 결합된 하나의 학문과 문화의 도시와도 같았다.


무세이온의 건설은 성공적이었다. 머지않아 예술과 학문을 총괄하는 고대 세계의 연구소가 자리 잡게 되었고 학문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대 저명한 수학자, 천문학자, 의사, 철학자들이 함께 머물며 연구와 토론이 이어졌다.


그들에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심장부와도 같았다. 도서관이 지식 생산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광기에 가까운 지식 수집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전 세계에서 지식을 수집하고자 주요 도시와 항구에 서기관과 학자들을 파견해 고대 문헌과 필사본을 수집했다. 가끔은 책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테네에서 아이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고전 비극 원본을 얻기 위해 막대한 은화를 예치하고도 빌려와서는 은화를 돌려받지 않고 원본을 도서관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항구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에서 책과 문서를 검색하기도 했다. 배에서 발견된 모든 문서는 도서관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 법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들은 원본을 도서관에 남기고, 필요에 따라 복사본을 만들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문서를 수집했다.


그렇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문서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고, 기원전 3세기 경에는 철학, 시, 수사학, 역사, 과학 등의 정보를 담은 약 50만 권의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그 규모를 확장했다.






이러한 집요함 덕분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점차 당대 최고의 고전 문헌과 학문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는 그저 그런 항구 도시에서 세계 지식의 교차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식을 향한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는 열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보를 통제하고 해석의 권위를 확보하려는 이집트 왕조의 전략적 노림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식을 소유한다는 것이 곧 세계를 정의하는 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그 힘을 손안에 넣은 뒤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식을 소프트 파워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슈르바니팔이 주로 점술과 내부 통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프톨레마이오스는 지식을 검증하고, 논의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외부, 즉 주변국들에게 문화적 명성과 국제적 영향력을 키워갔다.


실제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세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도시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지고 보존된 지식은 학문과 문화의 기준이 되었다.



▍왕실에서 임명한

▍도서관 사서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고대 지식의 보고로 거듭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운영을 책임졌던 탁월한 사서들의 존재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수석 사서는 왕실 법원에 의해 임명된 당대 최고의 학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번 임명된 사서들은 평생 동안 지식의 수호자이자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사서들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당시 대표적인 사서로 호메로스의 작품을 표준화한 제노도투스(Zénodote)가 있다. 그는 문헌 비평의 선구자라 평가받기도 한다. 뒤이어 활동한 칼리마쿠스(Callimaque)는 『피나케스(Pinax)』라는 제목의 도서 목록을 남겼는데, 세계 최초의 도서관 분류 목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라토스테네스(Ératosthène)는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 낸 천재 과학자였고, 사모트라케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que)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결정판을 편집한 인물로, 문학 비평의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사서들에게는 무세이온에 거주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었다. 숙식은 물론이고, 사서들은 모든 세금이 면제되었다. 개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급여까지 지급받았기 때문에 사서들은 학문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연구와 강의, 문헌의 비평과 재해석과 같은 업무를 주로 담당했는데, 읽고, 가르치고, 분류하고, 토론하는 일이 그들의 주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지식의 요새에도 쇠락의 순간은 찾아왔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몰락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몰락의 시작은 기원전 145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피스콘의 통치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 정치적 불안과 지식인 숙청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도서관을 지탱하던 학문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는 일이 발생했다.


최종적인 파괴의 시점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지만, 크게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전투 중 발생한 화재, 로마 시대의 장기적인 재정난과 무관심과 기원후 3세기 팔미라 세력의 침공, 심지어 후대에 전해진 칼리프 오마르의 파괴 명령 정도로 논의되고 있다.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여러 번의 물리적인 위기가 있었지만, 쇠퇴의 본질적인 원인은 내부에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축출되고, 지적 자유가 위축되었고, 남아 있는 지식인들은 권력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떠나갔고, 연구는 중단되었고, 지식의 흐름은 멈춰 서게 되었다.


시기를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지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몰락은 하나의 분명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지식을 지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책, 자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책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사람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이를 유지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고, 지속할 수 있는 안정된 사회적 기반이 사람과 지식과 권위가 흘러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 이미지 정보

1. 무세이온(Museion)의 상상도

2.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BnF

3. 불에 타고 있는 알렉산드라 도서관, 헤르만 골(Hermann Goll), 187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