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기 몰수된 책과 공공 도서관의 탄생
책을 사랑한다는 건, 공간을 사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토록 많은 문학과 철학, 예술과 지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화려한 작가들의 이름과 그들이 남긴 작품 너머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 공간이 바로 도서관이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을 뿐이다.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그 내면을 관찰하다 보면 드넓은 서재가 단순히 책이 쌓여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지식이 쌓이고, 시대의 사유가 숨 쉬고 있는, 사적인 욕망과 공적인 가치가 교차하는 무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프랑스 도서관의 역사는 단순한 시설의 발전과 함께 지식을 누구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시대적의 질문과 응답이 오가는 긴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것도 순전히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었기에,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문학이 태어나고 자라난 공간을 설명하는데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프랑스 도서관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그 시작은 누구였고, 어떤 철학이 그 공간을 이끌었는지, 또, 배울 점은 없었는지 들여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14세기 루브르 궁전의 서고까지 올라가 있었다. 도서관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한 것처럼.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뿌리는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은 1368년, 샤를 5세가 루브르 궁전에 세운 왕실 도서관(Bibliothèque du Roi)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도서관에는 1,200권가량의 필사본이 수집되어 있었다. 샤를은 이 책들로 왕실 전용 서고를 만들었고, 책들로 둘러싸인 공간은 지식과 문화의 권위를 상징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의 컬렉션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왕위가 바뀌고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책들은 유실되거나 다른 귀족들의 손에 들어갔다. 1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루이 11세(재위 1461~1483)에 이르러서야 왕실 도서관을 다시 복원하는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왕실 도서관이 재모습을 찾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루이 12세와 프랑수아 1세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사업을 이어받아 도서관을 더욱 풍성하게 확장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수아 1세는 1534년, 왕실 도서관을 퐁텐블로(Fontainebleau)로 이전하고 자기 개인 컬렉션과 통합하면서 자신만의 문화 프로젝트로 흡수했다.
그렇게 왕들의 의지로 마치 사치품처럼 발전하던 프랑스 왕립 도서관은 17세기 말에 이르러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692년에서야 처음으로 대중에게 문을 연 것이다.
당시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왕의 책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고, 도서관은 곧 새로운 사회적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공개는 초기에는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특정 허가를 받아야만 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지식의 보편성과 인간 이성의 힘이 강조되면서 도서관의 문턱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18세기 들어 루소와 볼테르, 디드로 같은 프랑스 백과사전파 철학자들이 왕립 도서관의 자료를 연구 기반으로 삼으면서, 왕실 도서관은 점점 더 지식의 실험실이자 시민의 공간으로 변모해 갔다.
도서관은 끊임없이 늘어나는 장서 때문에 공간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베르 드 코트(Robert de Cotte)와 자크 가브리엘(Jacques V Gabriel) 같은 유명 건축가들이 건물 개조에 나섰지만, 책이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긴 불가능했다.
늘어나는 책을 관리하기 위해서 더 넓은 공간과 더 정교한 관리적 체계가 필요했다. 왕실 도서관은 이제 단지 어느 한 개인이 책을 보관하는 차원을 넘어 국가적 차원의 제도와 시스템이 개입되는, 하나의 기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왕실 도서관은 점차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BnF)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그 성격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1792년, 프랑스혁명 직후 왕실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도서관은 국유화되었고, 모든 시민을 위한 지식의 공간이라는 슬로건 아래 진정한 공공 도서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귀족과 성직자, 해체된 수도원에서 몰수한 장서들이 국립 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그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러한 흐름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마자린 도서관(Bibliothèque Mazarine)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은 원래 루이 14세 때 수석 재상인을 지냈던 마자랭 추기경(Cardinal Mazarin)의 개인 컬렉션에서 출발했다. 마자랭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미 유럽 각국에서 희귀한 필사본과 인쇄본을 수집해 방대한 개인 장서를 보유한 상태였다. 그는 단순한 수집에 그치지 않고 이성의 전당을 남기고자 하는 야망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자린 도서관이 진정한 공공 도서관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가브리엘 노데(Gabriel Naudé)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노데는 1642년, 마자랭의 개인 사서로 임명된 이후 도서관을 전면적으로 개조하고, 도서 수집부터 분류 체계, 이용 규칙까지 모두 새롭게 구축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도서관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철저히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1643년, 마자린 도서관은 프랑스 최초의 공공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누구든 학문에 뜻이 있다면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방성은 당시 유럽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귀족이나 성직자, 특정 허가를 받아야만 도서관 출입이 가능했던 시대에, 신분과 출신을 불문하고 공공의 지식이라는 발상은 무척이나 진취적이었다.
도서관은
진리를 희망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이후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개방성과 공공성에 기초가 되었다. 마자린 도서관은 지식이 민주화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고, 많은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이곳에서 계몽주의의 기반을 다졌다.
게다가 노데의 철학은 프랑스 내에서 도서관 제도의 변화를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도서관의 열람, 분류, 정리, 관리라는 개념이 이 시기를 전후해 명확해졌고, 도서관에는 그 운영을 책임지는 전문 직업인 사서의 역할도 새롭게 정의되었다. 이후 프랑스 전역에 생겨난 공공 도서관들은 마자린 도서관의 운영 철학을 참고하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공공 도서관 시스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랑스의 도서관 문화는 왕실이나 개인 컬렉션뿐만 아니라, 18세기부터 등장한 상업적인 열람실(cabinets de lecture)을 통해서도 발전했다. 이 열람실은 지금의 공공 도서관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지만, 당시로서는 책을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구로 기능을 했다. 열람실에서는 소액의 요금이나 월 구독료를 내면 신문, 정기 간행물, 유행 문학 등 다양한 대중 자료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동네 책방과도 같았던 당시 열람실은 정기적으로 책을 살 수 없었던 교사, 숙련공, 소상인과 같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중산층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독서를 위한 장소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특히 프랑스혁명 이후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독서에 대한 수요 역시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요구에 맞춰 배움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써 열람실을 찾는 사람들은 빠르게 늘어났다.
이러한 열람실들은 공공 도서관이 제공하지 못했던 역할들을 자연스럽게 보완했다. 당시 공공 도서관은 대부분 학술서적과 고전 중심의 자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간 신문이나 신간 소설처럼 대중이 많이 찾는 자료는 접하기 어려웠다. 열람실은 시의성 있는 자료를 빠르게 제공함으로써 정보의 습득과 취미로써의 독서에 대한 필요를 만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출판 기술의 발전과 대량 인쇄의 보편화로 책과 신문, 잡지의 가격이 급격히 낮아지게 되면서, 열람실의 역할도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830년대 이후, 인쇄업계는 증기 인쇄기와 연속지 인쇄 기술을 통해 훨씬 더 빠르고 저렴하게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일반 대중들도 쉽게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으로 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860년대부터 프랑스 각지에서 시민들을 위한 무상 열람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열람실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도서관 역사에 있어 매우 급진적인 전환점이었다. 혁명의 시작과 함께 프랑스의 많은 제도들이 해체되었는데, 대학과 도서관, 수도원,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1789년 11월 2일, 프랑스혁명 정부는 성직자들의 모든 재산을 국가 소유로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왕실 도서관을 비롯해서 대학, 수도원, 그리고 교회가 소장하고 있던 방대한 장서들도 포함되었다. 이어서 1792년에는 귀족 가문들의 사설 컬렉션도 몰수되었고, 몰수된 책들은 각 지방의 중심 도시에 설치된 문학 자료 보관소(dépôts littéraires)에 분산·수집되었다.
지식의 해방은
때때로
그 보존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 갑작스러운 도서관의 국유화는 전례 없는 규모의 장서 수집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무수한 지식의 파괴를 초래하기도 했다. 혁명 정부는 몰수된 책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귀중한 자료들이 분실되거나 훼손되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장서를 보유하고 있던 생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des-Prés) 수도원의 도서관은 1790년대 초 혁명군에 의해 폐쇄되었고, 귀중한 필사본과 인쇄본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지거나 소실되었다. 일부 책들은 연료로 쓰이기 위해 불태워졌고, 표지가 가죽이나 금박으로 된 책들은 단지 장식용 재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Toulouse)의 예수회 도서관에서는 수세기 동안 축적된 철학, 신학, 자연과학 자료들이 강제 해산 이후 체계적 관리 없이 방치되었고, 일부는 현지 주민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팔려나갔다. 심지어 도서관 건물 자체가 군수 물자 창고나 농업용 창고로 바뀌면서 제 기능을 잃기도 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혁명기 10년간 프랑스 전역에서 약 3백만 권 이상의 책이 국유화되었으나, 그중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분류되지 않은 채 쌓인 책들은 습기와 곰팡이, 도난, 혹은 무지에 의한 폐기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훼손되었고, 필사본처럼 유일한 사본들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왕실 도서관이었다. 이 도서관은 1792년, 혁명 정부에 의해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으로 개명되었고, 공식적으로 국유 재산이 되었다. 당시 약 30만 권에 달하던 이 컬렉션은 혁명을 거치며 두 배 이상 증가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1818년에는 보유 장서만 70만 권을 넘어섰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 마자린 도서관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혁명 기간 동안 문을 닫지 않고 공공 기관으로 계속 운영되었는데, 사서인 아베 가스파르 미셸(Abbé Gaspard Michel, 일명 르블롱)은 몰수된 도서들을 적극적으로 도서관에 받아들였다. 그의 손을 거친 수많은 책들이 체계적으로 편입되면서, 도서관은 점점 더 공공의 지식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1793년, 국민공회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공공 교육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육 체계를 구상했고, 그 결과 1795년에는 각 도시에 중앙 학교(Écoles Centrales)를 설립하는 칙령이 내려졌다. 여기에는 학교와 함께 반드시 공공 도서관을 함께 설치하도록 명시되어 있었는데, 새롭게 지어지는 도서관은 공공의 성격을 갖고 지식을 보다 넓은 계층에게 제공하는 거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 집중식 공공 도서관의 운영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뒤이어 집권한 나폴레옹이 중앙 학교들을 폐지하자 이들에 딸린 도서관 역시 관리의 사각지대에 남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수많은 책들은 무작위로 지방 자치단체에게 분산되었는데, 체계적인 관리나 장기적인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결과, 혁명의 이상이 담긴 지식의 평등한 접근이라는 꿈은 혼란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도서관은 잠깐 시민 교육의 중심지처럼 기능했지만, 대다수는 전문 인력의 부재, 예산 부족,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 점차 그 존재감을 잃어갔다.
결국, 중앙 학교와 함께 설치된 도서관들은 지식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제도적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관된 운영은 불가능했고, 그 빛은 퇴색하고 말았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프랑스 도서관사에 있어 뼈아픈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소유하는 기관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제공하느냐가 공공 지식 체계의 핵심임을 일깨워주었다.
더욱이 도서관은 제도 그 자체만으로는 기능할 수 없고,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 사서의 전문성과 역할, 지역 사회와의 유기적 관계와 더불어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작동해야만 지속 가능한 지식 인프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겪고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지방 도서관이 체계를 갖추고, 국립 도서관이 구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도서관을 지탱해 온 사서들 역시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게 된다. 혼돈 속에 뿌려진 지식의 씨앗은 어떤 방향으로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이후 프랑스의 공공 도서관 제도는 그 지식의 보편화를 이루어내는 윤곽을 갖추게 되었다.
※이미지 정보
1. 마자린 도서관(Bibliothèque Mazarine)
2. 19세기의 상업적인 열람실(cabinets de lecture), Bn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