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매일 아침 같은 시간 지하철역에 모인 사람들은 늘 분주했다. 사람들은 지하철이 플랫폼에 들어서기 전부터 자신들의 자리를 잡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열차 칸 앞에 줄을 섰고, 모두가 익숙한 듯 움직였다. 나도 매일 같은 방식으로 사무실로 향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3-4]라고 쓰여진 곳에서 열차를 기다렸다.
열차를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은 매일 달랐지만 그 풍경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낯설지만 어딘지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은 열차 안에서도 이어졌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은 사람들, 스마트폰 화면을 끊임없이 스크롤하는 사람들, 젖은 머리로 나온 사람들과 이런 광경이 신기한 듯 사진을 찍는 사람들까지도 가끔은 익숙하게 느껴지곤 했다.
하루는 머리가 반쯤 희끗한 남자가 내 앞에 앉았다. 그는 종이 신문을 4 등분해서 작은 글씨의 사설을 읽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시대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그에게 눈이 갔다. 그의 눈동자는 잉크 냄새가 나는 활자를 따라 움직였다. 몇 년 동안 출근을 하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정된 눈빛, 읽기 알맞은 크게로 접어서 넘기는 손 짓이 과거 어디선가 본 것 같이 익숙했다. 정확히 언제, 어디서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많이 본 것 같은 눈빛과 손짓이었다. 하지만 그를 마주친 기억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기억과 익숙함이라는 착각
가끔은 낯선 사람에게서 익숙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녀)의 시선, 말투, 손짓 같은 작은 부분이 과거 기억 속 누군가와 닮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그 익숙함이 찰나의 순간이더라도 낯선 이에게서 그(녀)의 비슷함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기억이 만들어낸 착각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같은 시기를 함께 겪어왔지만 서로 다른 내용을 떠올리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이런 차이를 두고 누군가는 기억에 추억이라는 필터가 씌워져 있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렇게 서로 다른 부분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가끔은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기억은 사실 그대로를 복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단서들의 조합에 더 가깝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억양, 표정, 눈빛, 말투, 자세, 몸짓 같이 같이 아주 작고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과거를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기억이 실제 했는지, 아니면 단순한 착각인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과거의 일정 기간을 통째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편적인 정보들을 재구성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은 기억의 과정을 뇌의 작동 방식으로 설명한다. 뇌는 과거의 사건을 통째로 저장하거나 불러오지 않는다. 뇌는 다양한 정보를 늘 파편화된 단서들로 저장하고, 또 그러한 단서들을 재조합해서 현재에 맞게 과거의 장면을 재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표정이나 목소리, 시선의 방향 같은 단서가 작동하면, 뇌는 기존의 정보의 조각들과 결합시켜 하나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재구성된 장면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는 현재의 인식에 의해 다시 짜여진 모습인 것이다.
가끔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새로운 작은 디테일의 오류일 수도 있고, 간혹 실재하지 않았던 순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러한 기억의 오류는 왠지 모르는 익숙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착각에서 기인한 낯설지 않음. 그리고 더욱 가끔은 처음 겪는 상황이나 장소이지만 이전에 이미 경험했던 것 같은 느낌에 빠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험을 기시감(데자뷔)이라 부른다. 오류의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겹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기억의 오류를 경험한다. 이러한 기억의 불완전함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더욱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설은 한 사립 탐정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여정을 따라간다. 이 과정을 통해 한 개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 얼마나 모순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기 로망이 어느 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현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직업은 사람들의 과거와 행적을 추적하는 탐정이다. 타인의 삶을 추적하는 기술로 먹고살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과거는 파악할 수 없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탐색은 파리의 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래된 호텔, 카페, 변두리 골목,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장소들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과거를 복원해 보려 시도한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거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거 행적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볼수록 서로 모순되거나 어딘가 맞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기 로망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차점이 전혀 없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교류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인 모습도 있었지만, 그중에는 어두운 흔적들도 존재했다.
소설의 제목이 암시하듯, 그의 과거는 어두운 상점들에 숨겨진 물건처럼 불투명하고 닿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듯하다.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려 하지만,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은 모두 하나 같이 불분명한 그림자 같은 흔적들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끝내 그의 과거를 밝히지 않는다. 기 로망은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기억의 예술을 통해
인간의 운명을 해석한 작가
이 불완전한 서사로 파트릭 모디아노는 201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도 분명했다. “기억의 예술을 통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운명을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인간 정체성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이었다.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또 왜곡된 형태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또한 기억은 저장된 상자가 아니라, 불러올 때마다 현재의 나에 의해 다시 쓰이는 문장 같다고 설명했다. 그날의 빛과 냄새, 피부에 닿은 차가움 같은 감각은 비교적 오래 버티지만, 말의 순서와 감정의 결은 쉽게 섞이고 금세 지워진다. 사람들은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이야기의 연결을 만들어낸다. 사실 사이에 개연성을 끼워 넣고, 망각의 자리를 설명 가능한 문장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과거는 기억된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나에게 맞게 편집된 서사로 재탄생된다고 설명한다.
또 하나의 왜곡은 빌려온 기억에서 온다. 사진, 타인의 증언, 오래된 문서와 기록은 기억을 돕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윤곽을 강요한다. 사진 속 인물의 표정은 당시의 감정을 대체하고, 누군가의 증언은 기억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실제로 경험한 장면과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 그리고 사진에서 학습한 정보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모디아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수첩, 주소록, 신문 기사, 낡은 명함 같은 외부 단서를 좇으며 기억을 탐색하지만 항상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과거를 증명해 줄 확실한 물질적 증거처럼 보이지만, 결국 또 다른 층의 편집일 뿐이기 때문이다.
왜 낯선 사람에게서 과거의 그림자를 보게 될까? 뇌는 익숙한 패턴에 신속히 의미를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말버릇 하나, 걸음걸이, 고개를 드는 각도 같은 미세한 신호를 포착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미완의 퍼즐을 과거의 조각으로 채워버리게 된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유사성을 과잉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순간, 타인의 얼굴은 내 과거를 투사하는 스크린처럼 동작하게 된다. 그 결과 실제로 모르는 사람이지만 상대방에게서 익숙함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내 안에서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명칭들과 감정들이 그 사람의 표면에 임시로 붙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름, 나이, 직업, 사는 곳, 관계, 평판은 기억을 구성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결코 과거 어느 순간을 완벽하게 재현해 낼 수는 없다. 포장지가 그럴싸하다고 내용물까지 완벽하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서사는 늘 지연되어 도착한다. 이러한 시선을 모디아노는 흐릿한 증명사진, 반쯤 지워진 주소, 발음이 애매한 고유 명사로 표현해 놓았다.
스스로에 대한 기억은
수많은 단편적인 기억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망각의 층위 위에 놓여 있는
불완전한 상태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스스로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이 물음에 소설은 끝내 하나의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주인공 기 로망은 자기 정체성을 추적하지만, 모순된 단서들과 불확실한 증언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디아노는 그 불완전함 덕분에 비로소 실재에 더 가깝게 근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선명한 해석이 아니라, 끝내 닿지 못하는 여백이야말로 정체성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곧 스스로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지금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분명한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 자아는 수많은 단편적인 기억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망각으로 생긴 공백 위에 놓여 있는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흔히들 이립(而立)과 불혹(不惑)을 말하지만 그만큼 자기 파괴적인 목표도 없는 것 같다. 부조리하고, 양가적이고, 모순된 자신과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죄책감을 느끼고, 또 단단해져야 한다고 채찍질해야 하는 모순이 잔인하게 보일 때가 많다.
우리는 언제나 단절을 경험한다. 기억과 현재 사이에는 언제나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공백이 있기에 확신할 수 없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흔들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너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나를 만들어가고 있나?
가끔은 "나는 ㅇㅇㅇㅇ"라고 단정 짓고 이해하기보다 아직은 완결되지 않은 서사 같은 상태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모순되고, 왜곡되어 있지만 끊임없이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정의가 요즘에는 더 따뜻하게 들린다.
모디아노는 과거를 완벽히 회수할 수는 없지만, 그 단편들을 더듬어가면서 우리는 여전히 오늘의 자신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마치 영원히 남을 하나의 미완성 작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