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에 이르는 병] 을 읽고..
양육의 의무가 있는 부모로부터 보호는 커녕, 학대와 폭언 노출되었던 아이들의 심리적 취약점을 파고들어 20여명의 아이들을 살인한 연쇄살인범을 다룬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세가지의 질문이 남았다.
1. 자라온 환경이 불우하다고 죄를 저지른 사람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2.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온전한 보호와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은 평생 채워질 수 없는 것일까?
3. 코로나 시국에 광화문 광장에 모인 어른들은 ‘인정’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죄는 사회적 규약을 벗어난 행동을 정의하는 것이고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어느정도의 사회구조안에 최소한의 법이 동작한다는 신뢰를 가지고 살아간다.
사회적 환경이 불우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처벌이 줄어든다면, 역으로 사회적 환경이 너무 풍족해서 안하무인이 된 사람에 대한 처벌도 탕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둘다 결핍이거나 과잉의 상태이기 때문에 법의 형평성의 잣대를 재야 한다면, 예외가 있어선 안된다.
결론적으론 죄에 대한 처벌은 사람마다의 환경을 참작하게 되면 법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또한 판사의 개인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따라 판결의 예외가 발생하게 된다면 법치국가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두번째 질문인, 어린시절의 환경이 가져다주는 상처는 회복이 불가능할까 에 대한 내 생각은 ‘불가능하다’이다.
정신적인 트라우마, 공황장애, 신경쇠약, 우울증은 어릴적에 일종의 마음의 흉터다. 아무리 좋은 연고를 바르고, 새 피부를 이식하고, 피부에 좋은것을 먹는다 한들. 한번 생긴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되려 잘 관리해줘야만 흉터가 더 흉지지 않는다. 꾸준히 흉터를 관리하듯 자신의 마음을 타인의 도움을 받든, 전문가의 도움을 받든 정서적인 결핍을 무언가로는 반드시 채워줘야만 흉터가 덧나지 않는다.
세번째 질문이었던, 코로나 시국에 광화문 광장의 어른들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참 어려운 주제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힌트를 얻었다. 20여명의 아이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은 주변사람들이 그를 위해 탄원서를 작성할 만큼, 동네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신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비결은 바로 상대를 ‘인정’ 해주는 태도와 말이었다.
젊은층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광화문 광장에 모인 노인분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함께 비판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의 어른들 중에서도 세상과 사회는 인정해 주지 않지만 특정 집단이나, 지도자가 ‘나를 인정해준다’는 생각에 이끌려 나온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고 그들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납득이 되거나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도 남들에게 차마 말못하는 응어리가 있고, 흉터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소설에 나오는 불행한 가정환경의 아이들처럼.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는 ‘자유’가 붙은 모임을 만들고 활동하는 어르신들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것보다 앞서서 해야할 일이 있다. 그 흉터를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대화가 시작된다. 젊은이들의 입장에서는 오래전부터 세대 갈등이 시작된 마당에 꼭 이해하며 대화해야 하느냐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젊은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안되는 어른들이 30년, 40년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던 ‘그 아이’ 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