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파카 Sep 22. 2020

저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제목

나는 하버드에서도 책을 읽습니다. - 윤 지

제목에 끌려서 읽기 시작했지만, 저자는 책에서 제목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니, 제목을 잘못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 윤 지 작가는 자신이 가진 사회적 스펙이 자신에게 주는 가면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인데, 편집자는 책의 판매를 위해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제목을 어거지로 집어 넣었다.


윤 지 작가는 '사람', '관계', '사회' 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눈길을 가진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일상속에서 답하며 고민한 내용들을 책으로 써 내려갔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있지 않은 사람이라서, 100% 공감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진지한 고민과 대답들이 가득한 내용들을 발췌하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신사의 품격을 잃지 않고 주변을 사랑하며 살았던 백작이 정말 존경스럽다. 사회가 어떤 잣대를 내밀든 그는 주어진 환경에서 행복과 설렘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속에 반응하는 말과 태도가 그 사람의 감정과 생각까지 지배한다. 극악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내공을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상황속에서 살아가는가,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반응하는가. 문득문득 휘몰아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이 없다. 다소 주위사람들은 힘들어 할 수 있지만 스스로는 감정을 쌓아두지 않게 되어 스트레스가 많지 않다. 단, 감정을 표현해내지 못했을 때는, 머릿속을 떠돌다가 스트레스가 되곤 한다. 그때 특효약은 '글쓰기'이다. 마음에 스며든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글로 풀어내면 마음이 굉장히 풀리게 된다.


감정을 그 자리에서 즉시 풀어내지 않고, 잘 묵혀두었다가 글로 풀어내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한다. 내가 뜻하든 뜻하지 않든 외부로 표현되는 감정은 타인의 감정에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뿐, 주변사람들에게 까탈스로운 사람이 된다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능이 유전자에서 지워지지 않는 인상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글쓰기'를 통해 감정을 풀어내다보면, 자신의 내면을 한걸음 뒤에 물러서서 제 3자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선사한다. 감정이 추스러지지 않았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실수또한 인정하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일기'는 내면의 성장을 돕는 가장 유용한 도구인데, 학교 교육이 '일기'에 대한 선입관을 갖게 하는 바람에 한국사회의 어른들에게는 좋은 도구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된 것 같다. 감정을 풀어내는 글쓰기는 사고와 논리를 단련시켜주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설득과 협상을 이끌어내는 힘을 길러준다. 내 마음대로 글을 쓰다가도, 활자로 표현된 상황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글을 고치는 과정을 통해 논리적 모순이나 맥락을 벗어나는 흐름을 발견해 낸다. 글이 논리적으로 바뀌다 보면 말도 따라오게 된다. 성공한 인생은 사람의 기준마다 다르다. 하지만 글쓰기라는 도구를 잘 활용할수록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노라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나에게는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나라, 먹어보지 못한 음식, 느껴보지 못한 감정,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으니 가격 대비 얼마나 편리하고 유익하고 신비로운 시간인지. 책에서 만난 여러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으며 위로와 용기를 얻은 덕분에, 그 힘으로 치열했던 민사고 시절과 유학 생활을 이겨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인해 쏟는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은 '책'을 도피처로 삼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불안과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도 책에 몰입하게 되면 잠시라도 생각을 쉬고 머리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책이라는 도구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살펴보고 나아갈 수 있는 길잡이가 아닐까?



“윤 지 씨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뭔가가 있어요. 마음이 풀릴 때도 있고 뭉클하거나 울컥할 때도 있고요.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윤 지 씨가 대신 소개해주니 다양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요.”

누구든 문자를 배운 사람은 글을 쓸 수 있지만, 아무나 타인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감력'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자신을 위한 글은 쓸 수 있지만 타인을 위한 글을 쓸 수는 없다. 저자의 서평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일으키는 힘이 있는 글이지 않을까.



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오랜 시간 숨 막히게 만드는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내 왕관이 나를 옥죄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누군가는 그 왕관 또한 내가 선택한 것이고 어쨌든 좋은 결과이니 그 정도의 무게는 당연히 견뎌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가수 설리가 떠오른다. 불안과 우울, 거절과 비난의 손가락질 속에서 가족에게조차도 보호받지 못했다.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불안, 공황은 부모의 영향이 팔할은 미친다고 본다. 자녀를 향한 과도한 기대와 집착이 낳은 결과가 아닐까.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아이에게 잘못된 기대와 자신을 투영하려는 욕심을 가진 어른들의 그릇되 바램이 있을 뿐이다.



나는 분명 내 머리 위에 겹겹이 쌓여가는 왕관 때문에 죽을 뻔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여태 내가 기울인 노력이 잠깐 쉰다고 무너지거나 어디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죽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힘들 때도 왕관을 내려놓지 못했다.


내게 왕관은 무엇일까? '직장', '기술' 이정도 인 것 같다. 과연 나는 왕관이 나를 짓누를 때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을까? 먹고사는 문제를 '기술'이 해결해주고 있는데,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술이 아닌 전혀 새로운 분야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젊음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왔던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결정의 기로에 서 있다면, 과감히 문을 박차고 나올 수 있을까? '불안'의 급류에 힘을 풀고 나의 몸을 맡길 수 있을 만큼의 용기가 있는가? 아직은 어떤 선택도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그럴 용기가 없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직장을 옮기거나 은퇴를 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갈까. 생각만 해도 괴롭다. 저자의 위로는 학생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용기를 준다. '왕관'을 내려놓는다고 하더라도 살아온 삶이 무너지거나 어디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왕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더라도, 겁먹지 말고 힘내라고.



나에게 문유석 판사님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인간 혐오증이 있으면서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때문이었다. 어쩌면 판사석에 앉아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한 번 만나기도 힘들 법한 범죄자들, 온갖 강력범죄를 수없이 접하셨을 테니 인간이라는 존재를 혐오하시는 게 당연하지 아닐까 싶었지만, 판사님은 오늘도 여전히 묵묵히 자신 앞에 놓인 사건에 충실하고 피해자와 피의자들을 배려하며 판결을 내리신다.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매일같이 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인간을 혐오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다는 문유석 판사님의 태도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니다. 사람을 통해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기대했던 한 사람이 추악한 모습을 보일 때 밀려오는 좌절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을 가져다 준다. '너도 별 수 없구나, 너도 똑같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깔고가야 사람에 대한 상처를 덜 받는 것 같다.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가?' 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인간이 '공정'하게 처벌을 받았는가에 판가름 된다. 만약 사회에서 공정치 못하게 판결이 내려졌다면, 피해자는 '그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인간'이 사회로부터 적절한 처벌을 받았다면,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용서와 공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에게 지켜야 할 선을 넘으면서 상처를 주고받는다. 말이 칼이 되어 타인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인터넷의 익명성을 빌려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다. 조금만 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사회가 정해놓은 미적 기준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말의 선은 어디까지 일까? 욕설이 섞이 지 않은 말?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말? 말의 선은 듣는사람의 context에 따라 달라진다. 회사에서 말의 선은 어디까지 여야 할까? 듣는 사람이 들으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아야 하는 선일까? 이 기준에서라면 나는 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내가 담당한 역할은 평가와 피드백인데, 감정을 다치지 않을 만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숙제이다. 오늘하루도 많이 말하기보다, 많이 듣는 하루가 되길 기대하고 스스로 마음속에 다짐하자.



성격이 성격인지라, 이왕이면 한 번에 완벽하게 시험을 끝내고 싶어서 1년 동안 학교 수업과 엘셋 준비를 병행했다. 참고로 기출문제 한 회 분량을 푸는 데 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나는 80회를 두 번 풀었다. 나는 일단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가 얼마나 간절한지와 별개로 미친 듯이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라, 다행히도 6월 시험에서 곧바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았다.


목표를 세우면 얼마나 간절한지와는 별개로 미친듯이 최선을 다하는 타입. 부럽다. 뭔가에 미친듯이 빠져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럽다. 하루에 20분 공부하는것도 힘들어 하는데 160회 * 3이면, 480시간을 1년동안 쏟았다는 건데. 대단하다. 학교수업을 따라가기에도 공부시간이 모자랐을 텐데. 얼마나 간절한지 와는 별개로 미친듯이 최선을 다한다..흠.. 나도 한번 시도해볼까.? ISTQB 수석을 한번 노려볼까나.



정치학을 공부하는 후배에게 그럼 정치학에서 제시하는 혐오 해결책은 무엇이고, 너는 그 해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후배는 잠자코 고민하더니 정치학뿐 아니라 여러 학계에서 전반적으로 제시하는 답이 ‘대화’라고 했다.


혐오의 해결책은 '대화'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단절되는 순간 혐오는 씨앗을 발아한다. 하지만 대화로 연결되어있고 입장이 다르더라도 대화의 장을 마련하여 한 공간에서 서로의 눈빛과 의견을 주고 받다보면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대화가 없는 일방적인 혐오는 다름을 인정할 힘과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 다만, 추측과 오해로 상대를 비난할 상황들만 가중된다. 대화의 힘은 혐오를 파괴할 만큼 강력하다. 코로나 시대에 단절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대화의 방법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화가 귀찮고 힘들다. 대화하기 보다는 그저 활자를 읽고 저자에게 답하는 글을 쓰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것이 편하다.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은 분명한 힘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피곤하고 에너지가 드는 상황이 마냥 즐겁지 만은 않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워도 꾸준한 대화를 통해 타인을 알아가면 어느새 자신이 누구인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찮다고, 나와 상관없다고, 피곤하다고, 골치 아프다고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기를 거부한 채 마음을 닫는 데만 급급하다면, 나와 다른 존재는 나에게 더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대상이 될 것이다. 나 또한 타인에게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로 기억되는가. 사실 평소에도 크게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부분이라. 별로 생각이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는 '나'인데 '남'을 의식하느라 '나'에게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다만 적당한 수준에서 이해관계가 있는 관계들에 대해선 남을 신경쓰는 관심이 필요하다. 지금이 좋다. 외아들이라 외로움을 모르고 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하고 홀가분하다.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지도, 부담받지도 않는 관계속에 살아가는 것이 내겐 행복이다. 소위 그릇이 커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관계를 목적보다는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성취와 명예를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릇이 커져야 한다고 떠들고 다닌다. 어설픈 관게에 신경쓸 시간에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댜보고 솔직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이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무엇인지. 솔직하게 스스로와 대화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는 안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테러라는 오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