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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통 Apr 02. 2018

대한민국은 5G 시대,
보고서는 1G 시대

우리 회사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을까?

적고 있습니다. 

누구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덤덤히.

내가 느낀 직장과 청춘에 대해서.

그것이 때론 불편한 이야기 일지라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직장인은 죽어서 문서를 남긴다” 


이런 말이 있다.

'닭장 속 닭들은 하루하루 알을 낳기 바쁘고, 사무실 속 직장인들은 문서를 낳기 바쁘다.'


각종 기획안, 경쟁사 동향 분석, 프로젝트 진행 경과 보고, 임원 회의체 진행 장표 등등. 오늘도 직장인들은 앉은자리에서 수많은 서류 다발들을 찍어낸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며 보았던 어떤 동료의 경우, 이런 경우를 보았다. 

그가 하는 주요 업무는 매주 1회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주요 임원 회의체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직원 별로 각자의 업무를 정량화해보자는 명목 하에, 각자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하여 엑셀에 기입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는데, 그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아니, 내가 정말 일주일 내내 매일같이 야근을 하면서 일했는데 말이지. 막상 내가 하는 일을 엑셀에 적으려니 딱 하나밖에 없더라고. ‘임원 회의 장표 작성’. 그거 딱 하나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외에 쓸 말이 없어..” 


그는 약간의 허망한 표정으로 넋두리를 늘어놓았고, 본인의 모니터 속 업무 폴더를 보여주었다. 

그 폴더 안엔 수십 개의 엑셀 파일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파일명은 이러했다.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1.0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1.1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1.2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1.3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2.0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2.1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3.0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3.0_최종 

OO 회의 진행 장표_170723_V3.0_최최종 

... 


더 이상은 이 소중한 종이를 낭비하는 듯 하니, 이만 줄이도록 하자. 




그는 ‘최최종’이라는 그 알을 낳기 위해서,
새벽까지 그렇게 매일을 소리 내어 울었다 보다 


대한민국은 IT 강국으로,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까지 가능한 5G 시대를 앞두고 있다. 

이렇게 대용량의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 폴더 속 문서 버전의 속도는 마냥 느리기만 하다. 무엇이 그의 문서들에 이렇게 버퍼링이 걸리게 하였을까? 



필자 또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 장으로 만들어와, 한 장으로 요약해와” 


해당 안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배경, 내용, 기대효과 등을 PPT 한 장 안에 명쾌하게(?) 녹여오라는 것이다.  

그래,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업무 스펙트럼 자체가 넓은 상위자 입장에서, 지금 진행되는 모든 안건에 대해 속속들이 꾀고 있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디테일한 부분들은 실무자 단에서 고민하고 생각하면 될 일이고, 상위자는 그 진행과정에서 주요한 내용 이라든지 의사 결정할 부분에 대해서만 알면 될 것이다. 상위자는 그럴 여력도 없거니와, 실무진 또한 A부터 Z까지 마이크로 매니징 하려는 상사가 너무 피곤하다는 푸념을 늘어놓지 않는가? 


다만, 문제는 그 알을 낳기 위한 관문들에서 발생한다.



 마치 게임 속 단계별 보스들과 비슷하다. 


최종 보고자는 게임의 끝판왕이고, 그 최종 보스까지 가기 위해 수많은 왕들을 깨고 올라가야 한다. 

차장, 부장, 팀장, 담당 등. 수직적으로 깊은 하이 라키 구조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라면, 문제가 더욱 심각할 것이고, 해당 과정에서 한없는 버퍼링이 걸리게 된다.  


문서의 모양, 글자의 폰트 및 크기, 정렬 방향, 첫 줄의 들여 쓰기 정도, 단어의 선택 등등. 


예를 들면, 이 구절 글자는 폰트 9에 녹색으로 넣도록 하고, ‘재가 바랍니다’라는 구절을 쓸 것인 것 아니면 ‘재가 부탁드립니다’라는 구절을 쓸 것인가에 대하여, 수 없는 지시들이 떨어지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이쁘니 작업’ 이랄까? 

문서를 한눈에 보기 좋게, 예쁘게 만든다는 뜻이다. 문서를 예쁘게 꾸미기에 바빠지다가, ‘해당 문서를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문서의 속도는 결국 그 옛날 016 번호 '걸리면 걸리는 걸리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이야기를 한다.  


보고서 역시 동일하다. 

이 보고를 통하여 상위자에서 전달되어야 하는 알맹이는 무엇인지, 또는 그를 위해 의사결정이 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속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에 대한 고민이 없이, 그저 잘 빠진 예쁜 보고서만을 만들려고 한다면, 


안이 텅 비어버린 선물 상자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속도의 차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5G는 대용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다! 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등의 상용화가 가능하다! 이 것이 진짜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회사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을까? 

5G 시대? 아니면 1G 시대? 

우리 회사는 영상 통화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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