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column
영화 좀 찍는 나라라면 국가를 대표할만한 감독이 한 명씩 있기 나름이다. 국내에도 훌륭한 감독들이 많이 있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할만한 감독 한 명을 뽑아야 한다면 아마도 박찬욱이 그 적임자다.
애당초 평론가로 자신의 영화 커리어를 시작했던 박찬욱은 영화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이 직접 쓴 책에 1만 편에 가까운 영화를 인용하는가 하면 촬영 현장에서도 다른 감독의 영화를 볼 정도라고.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역시 달랐던 것인지 대학생 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명작 중 한 편인 <현기증>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를 결심했다는 영화광 박찬욱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현기증>또한 개봉 당시 흥행에 참패했던 것처럼 박찬욱 감독의 90년대 작품들은 연출 데뷔작인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비롯해 하나같이 소수의 마니아들에게 지지를 받았을 뿐 흥행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와 함께 박찬욱의 위치는 크게 변화한다. 국내 박스오피스 흥행은 물론 각종 시상식에서도 주인공이 된 박찬욱은 규모 있는 영화들을 연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후 <복수는 나의 것>으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복수 삼부작의 첫 스타트를 준수하게 끊은 그는 2003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작, <올드보이>를 연출하게 된다. 박찬욱의 전매특허인 그로테스크한 디테일과 독특한 미장센으로 가득 찬 스릴러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며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일종의 선언 같은 작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올드보이>는 국내에서도 3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하는 한편 시상식에서도 상을 쓸어 담았다. 유행어와 명장면을 다수 생산해낸 <올드보이>는 헐리웃에서 리메이크되고 해외 감독들 또한 <올드보이>에 감명받아 만든 장면들이 있다고 할 만큼 국내 영화 중에는 전례 없이 전 세계적 영향력을 끼친 작품이었다. 개봉한 지 무려 16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박찬욱의 대표작은 <올드보이>일만큼 <올드보이>의 상징성은 그에게도 충무로에도 명작 그 이상이다.
<올드보이>로 한국영화의 국제화를 열어젖힌 박찬욱은 이후 <친절한 금자씨>로 복수 삼부작을 마무리 짓고 <박쥐>로 다시 한번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자신이 국제무대에서 통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다. 이후 <스토커>를 통해 헐리웃에 진출한 박찬욱은 2016년 연출한 <아가씨>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그야말로 광폭 글로벌 행보를 선보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국내 감독 중에는 가장 글로벌한 감독 중 한 명일 텐데 박찬욱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인 2018년에는 영국 BBC와 함께 동명의 소설을 드라마화 한 6부작 영국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을 연출하며 더 이상 그의 작품 활동에 국적은 중요치 않게 되었다.
박찬욱의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때 미장센을 빼놓고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가씨>의 경우만 봐도 칸영화제에서 본상 수상엔 실패했지만 예술분야 최고상인 벌칸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았다. <아가씨>뿐만 아니라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매번 연출과 미술에 있어서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다양하고 매혹적인 장면들로 관객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연출하는 박찬욱 감독의 다소 고어한 미장센에 거부감을 표하는 관객들도 없지 않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피가 튀고 잔인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고어함과 그로테스크함만을 박찬욱 미장센의 전부로 치부하는 것은 그가 한국영화에 부여한 새롭고 도전적인 아름다움을 심하게 단순화시키는 오류라고 생각된다.
정적인 것보단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하는 박찬욱은 평균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과감하게 녹여낸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말을 실현해나가고 있다. 덕분에 국내에서 비슷한 시기에 자신보다 훨씬 더 흥행에 성공한 감독들과 끊임없이 비교당하기도 한다. 박찬욱의 영화에 '대중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상업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 '흥행력'을 때어내고서도 그가 2000년대 초반 시작된 한국영화의 황금기 중심에 있었음은 물론 그의 도전적인 작품들이 전 세계에서 한국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보여온 일종의 고집, 혹은 그 방향성이 평균적인 흥행을 추구하느라 특색을 잃어버린 충무로 속에 1,000만 영화 한 편 없는 박찬욱을 국가대표 감독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