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review
영화는 종합 예술 콘텐츠인지라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어느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고 합을 이뤄야만 좋은 작품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은 여러 가지 요소 중 유독 한 두 가지 요소들이 감정을 깊게 파고들기도 한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경우는 최민식과 한석규의 연기가 그렇다.
기본적으로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함께 이룬 업적들을 이야기의 뼈대로 가져간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고는 하나 대부분의 사극이 그렇듯 서사의 세부적인 사항이나 인물들의 결정에 대한 근거는 많은 부분 연출자의 상상이 만들어낸 픽션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런류의 팩션 사극들이 조심해야 하는 부분은 큰 틀안에서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것, 그리고 허구적 요소들이 충분히 설득력을 갖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이 두 가지 면에서 모두 합격점을 줄 만하다. 관객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세종과 장영실, 그리고 발명품들에서 팩트의 향기를 느끼는 동시에 상상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었던 화면과 대사에서 픽션의 신비로운 맛도 느낄 수 있다.
근대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관객 중 어느 누구도 등장인물들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세종과 장영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믿고 확증하지만 그들이 어떤 말투를 가졌고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지 알지 못한다. 여기부터 한석규와 최민식의 위대함이 태동한다. 쉬리 이후 20년 만에 만난 두 남자는 622년의 세월을 거슬러 조선의 두 남자를 스크린으로 소환한다. 대부분의 영화적 캐릭터는 서사의 초반부를 거치며 그 정체성과 분위기를 확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한석규와 최민식은 연륜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두 명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세종이고 장영실이다. 그들은 관객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득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이 어떻게 이 두 명은 기승전결도 없이 그 인물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두 배우의 역량이 영화를 끌고 간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에 묻어있는 허진호 감독의 진하고 독특한 향기도 한 번쯤 돌아볼만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영화를 만들어낸 로맨스 장인, 허진호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도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단지 이번 영화에서 다른 점은 사랑의 대상이 여자와 남자가 아닌 두 남자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의 두 남자는 에로스적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평생에 한 명쯤은 얻기를 원하는 깊은 우정의 브로맨스를 나눈다. 영화는 분명히 신파가 아닌데 두 남자의 서로를 향한 마음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불치병과 가난 없이 한국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허진호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세종과 장영실, 두 남자의 브로맨스를 깊이 있게 풀어낸 웰메이드 사극이다. 물론 영화에 단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중반이 지나가며 서사가 쳐지고 영화 속에서 20년의 시간을 오가다 보니 이야기가 다소 끊기는 지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최민식과 한석규가 보여주는 환상적인 연기,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연기가 전달하는 감정과 감동은 분명히 확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