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클래식
매거진 '언제나 클래식'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유독 코미디 영화는 두 가지 장르가 혼합된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로맨스 코미디, 블랙 코미디 외에도 드라마나 액션까지, 코미디 영화는 어떤 장르든 편안하게 품어내는 재주를 가졌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는 이런 코미디 장르영화가 가진 확장성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는 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나에게 단 두 장면을 꼽으라면 경비원 역의 변희봉이 보일러 김씨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놓는 장면과 박현남 역의 배두나가 부랑자에게서 개를 찾기 위해 뛰어갈 때 그 뒤로 노란 우비를 입은 남자들이 무수히 등장하는 장면이다. 영화 내내 드라마 위에 코미디적 요소를 간간히 뿌리던 봉준호 감독은 이 두 장면에서 본인의 장르 파괴자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으스스한 지하실 어두운 화면 속 변희봉의 주름 사이사이에 드리운 그림자와 희번덕한 눈동자는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며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변희봉의 입을 통해 듣는 80년대 후반 날림공사로 인해 벌어진 참사는 그것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관객들의 긴장한 근육 사이로 씁쓸한 기운을 운반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이 장면은 여느 사회풍자 영화의 한 씬 정도가 되었겠지만 봉준호 감독은 결코 유머를 빼먹는 법이 없다. 변희봉이 구성지게 살려내는 ‘보일러 돈다잉~’이라는 대사는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 사회풍자 이야기에 집중하던 관객들에게서 실소를 뽑아내는 봉준호적 요소다.
보일러 돈다잉~
한 편 배두나가 부랑자에게서 개를 되찾는 씬은 어떤가? 앞서 설명한 장면이 연출적 요소들을 활용해 장르의 변주를 꾀했다면 이 장면은 대놓고 판타지적 요소들을 첨가함으로써 영화의 장르적 규정을 스스로 비웃어버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봉준호 감독의 이런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감한 시도가 신기하게도 그 장면에 찰떡처럼 어울려버린다는 사실이다. 인물들의 설정부터 배경까지 108분 동안 현실성을 유지하던 영화는 단 몇 초의 허구적 일탈로 영화를 망치기는커녕 판타지 장르까지 끌어안는 동시에 스스로의 비웃음을 관객들의 진짜 웃음으로 전환하는 마법을 발휘한다.
영국의 소설가 위다가 집필한 ‘플란다스의 개’는 주인공 네로와 그의 개 파트라슈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가진 소설이다. 반면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는 영화의 주인공 윤주가 자신이 원하던 교수가 되며 사뭇 해피엔딩처럼 마무리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영화를 모두 관람한 관객들은 윤주가 달성한 목표 아래로 흐르는 썩은 강물의 냄새를 외면할 수 없다.
우리가 20년간 지켜봐 온 봉준호 감독의 실력은 사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영화적 요소들로 세운 줄기 위에 다양한 장르의 잎들을 활용해 관객들의 눈과 귀를 현혹한다. 그리고 끝내 피어오른 결말의 순간은 마냥 비극적이거나 슬프지만은 않다. 하지만 나무가 흠뻑 빨아올린 비극적 사회의 수분은 결말의 순간에 분명하게 담겨있다. 봉준호만의 ‘소셜’ 코미디가 탄생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