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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보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둔 여배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서 비슷한 크기의 강렬함을 10년 넘게 유지하는 배우는 많지 않다.
CF 출연작이 워낙 많다 보니 전지현이 CF만 줄줄이 찍다가 영화 한 두 편으로 대박 난 배우인 것 같지만 의외로 전지현의 출발은 탄탄했다. 에꼴이라는 잡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한 전지현은 1999년 박신양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화이트 발렌타인>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우신인상을 탄 것은 물론 같은 해 출연했던 드라마 <해피투게더>로 SBS연기대상 여우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태생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모두 품을 인재임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연이어 2000년에 이정재와 함께 출연한 <시월애>는 비록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 멜로물의 계보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작품으로 회자된다. 데뷔 이후 스크린에서 꾸준히 멜로 경험치를 쌓은 전지현이 <엽기적인 그녀>에서 포텐을 터뜨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충무로를 대표하는 수많은 영화 중 굳이 수식어가 필요 없는 영화들이 있다. 로맨틱 코미디물에 있어서 <엽기적인 그녀>가 그런 작품이다. 2001년 당시 480만 명이 넘는 국내 흥행은 물론 글로벌, 특히 중국에서 역사적인 한국영화 신드롬을 일으킨 <엽기적인 그녀>는 지금의 전지현을 있게 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엽기적이고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청순하고 통통 튀는 매력을 꽉 차게 담아낸 '그녀'로 분한 전지현은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대한민국 로코물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1981년생인 전지현이 불과 21살에 이룬 성공이었다.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 이후 전지현에게 비슷한 역할의 시나리오 공세가 있었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지현은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자기복제하는 편한 길을 과감히 포기하고 2003년 <4인용 식탁>이라는 공포 스릴러 영화로 연기 변신을 시도한다. 기면증을 앓는 여자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 전지현은 여전히 그녀를 따라다니던 연기력에 대한 의문증을 어느 정도 때 버리는 데 성공했지만 흥행에서는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이후 <엽기적인 그녀>의 프리퀄 격인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로 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잠시 본인이 가장 잘하는 캐릭터로 돌아오는 듯했던 전지현은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블러드>, <설화와 비밀의 부채>등에 연달아 출연하며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지현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한 편도 흥행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녀의 커리어는 겉으로 보기에는 내리막, 배우로서는 단련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스크린에서는 우하향을 타고 있는 전지현이었지만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지지 않는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데뷔 해인 1997년에 이미 4개의 CF에 출연, <엽기적인 그녀>가 대성공을 거두기 이전부터 삼성전자의 마이젯 프린터 CF모델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전지현은 2001년부터 2012년까지 40여 개에 달하는 CF에 출연하며 명실공히 대한민국 'CF여왕'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활약을 펼쳤다. 전지현이 등장한 CF는 산업군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데 가전제품, IT서비스, 식품, 의류, 생필품 등 나오지 않은 제품군을 찾는 것이 빠를 정도다. 무엇보다 '엘라스틴 했어요'로 대표되는 LG생활건강의 엘라스틴 CF모델은 무려 11년을 유지했으며 LG생활건강에서 전지현 헌정 영상을 만들어 줄 정도니 CF스타 중의 스타라 할 만하다.
전지현이 CF만 찍는 연예인이라는 관객들의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2012년 영화 <도둑들>의 예니콜로 화려하게 복귀한 전지현은 같은 해 <베를린>으로 원투 펀치를 날리더니 2013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엽기적인 그녀>를 넘어서는 역대급 성공과 함께 본인이 결코 CF만 찍는 여배우가 아님을 당당히 증명했다. 이후 2015년 출연한 <암살>로 <도둑들>에 이어 3년 만에 1,200만 관객을 두 번 달성한 전지현은 대종상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혹자는 'CF나 찍는'이라는 수식어로 전지현이라는 배우를 손쉽게 재단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의 시작점에 발목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2001년 자신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었던 청춘스타는 무려 10년이 지난 후에 본인이 출연한 40편의 CF들은 부족한 능력을 가리기 위한 도구가 아닌 그저 쌓아 올라간 내공의 결과물일 뿐임을 증명했다. 글로벌을 사로잡은 드라마 스타, 3,000만 명을 극장으로 끌어들인 흥행배우, 어떤 상품이든 자신의 브랜드로 소화해내는 CF여왕으로 성장한 전지현은 엽기적인 '그녀'에서 별에서 온 '그녀'로 이제 막 진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