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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구름 Feb 02. 2023

바빌론, 분산된 영양분

fresh review

과일나무를 키울 때 가지치기를 하는 이유는 가지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과일 하나하나를 상품성 있게 키우기 위해서다. 10개의 가지로 갈 영양분이 5개의 가지로만 가도록 관리해야 10개의 볼품없는 과일이 아닌 5개의 실한 과일이 자란다.


<바빌론>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작심하고 헐리웃에 바치는 헌사이자 러브 레터다. 감독이 전작들에서 선보였던 기술과 감성이 한층 날카롭게 영화를 채우고 서사의 변곡점을 만드는 음악은 듣는 재미를, 눈을 뗄 수 없는 1920년대 헐리웃 의상들은 보는 재미를 충족시킨다. 무엇보다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 장편 상업영화 주연이 처음임에도 놀랍도록 열연을 펼친 디에고 칼바의 연기는 긴 영화의 러닝타임을 흘러가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시대를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낸듯한 세트와 배경은 이 영화의 제작비가 왜 1,000억에 육박하는지 납득하게 만든다.

러브 레터


이처럼 <바빌론>이 가진 영양분은 많은 정도를 넘어 풍성하다고 할만하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무슨 얘기를 해보고 싶었는지, 어떻게 해보고 싶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은 간다. 하지만 <바빌론>이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 크고 장황하다. 서사의 가지에 달린 배우들이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것은 인정할만하지만 189분이라는 시간조차 모든 가지에 영양분을 고루 보내기엔 부족해 보인다. 뿌리에서 올라올 땐 충분해 보였던 영양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가지로 퍼지며 분산되고 줄어들어 어느 가지 하나 만족스럽지 못한 열매를 맺는다.

분산


결론적으로 <바빌론>은 충분히 즐길만한 요소들이 있음에도 만족스럽게 매듭지어지지 못한 작품이다. 관객 개개인이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기에 누군가는 <바빌론>이 가진 장점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 <바빌론>이 들어갈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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