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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구름 Apr 27. 2023

무명, 고오진감래

fresh review

러닝타임 내내 텐션이 높은 영화가 있는가 하면 기를 모으듯 초반은 지루하지만 후반부에 힘을 쏟아붓는 영화도 있다. <무명>은 후자에 가까운데 달콤한 열매를 보기까지의 시간이 꽤 길다는 것이 어려운 점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영화들에게 주어지는 배경 설명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하고 갈 것인가.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할 것인가. <무명>은 과감하게 후자를 선택했고 개인적으로 이 선택이 내가 영화 중반까지도 서사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가뜩이나 영화의 시기와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데 등장인물들은 설명도 없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거침없이 넘어가는 장면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집중력을 잡아줄 기반 없이 생각이 공중에 부유하고 있다 보니 인물들의 대화도, 그들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난다. 이거 뭐 하자는 영화인가.

뭐야?


그런데 중반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흩어진 천 조각들이 야금야금 기워진다. 요리조리 맞추고 잇다 보니 어어어 하다가 그럴싸한 옷 한 벌이 만들어지는 기분이랄까. 천 조각 하나하나는 다소 엉성하고 거칠지만 막상 다 기워 놓으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양조위의 농익은 연기가 튼튼한 실이 되고 청얼 감독의 도전적인 연출이 바늘이 되어 짝을 이룬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길지 않지만 선이 살아있는 액션씬과 뒤이어 이어지는 서사의 마침표다. 이쯤 되면 영화관을 박차고 나가고 싶던 마음은 꽤나 누그러지고 영화를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진다. 고통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까, 굵고 짧은 영화의 후반부가 유독 달게 느껴진다.

좀 치네?


결론적으로 <무명>은 오래도록 쓴 것을 참아서 마침내 단것을 맛보는 영화다. 무슨 상황인지 모를 초중반을 눈과 귀에 차곡차곡 담으며 잘 버텨내면 후반부에 쌓아둔 것들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온다. 물론 누구에게도 고통을 강요할 순 없는 만큼 편안하게 추천하기는 쉽지 않은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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