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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내기 권선생 Jul 15. 2024

반바지 입고 출근하는 교사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어 그런지 야외 활동을 하는 날이면 온몸이 금방 땀으로 가득 찼다. 오늘은 강당에서 체육 수업을 하는 날이었지만, 여름날이면 습기가 많아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더워졌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집으로 보낸 다음에야 의자에 앉아 제대로 땀을 식힐 수 있었다.


수업 준비를 마치고, K-에듀파인(지방교육 행 · 재정 통합시스템)에 접속해 접수된 공문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며 아주 반가운 제목의 공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공무원 복장 간소화 관련 안내"


 딱딱한 공직 사회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업무 효율 향상을 위해서라도 복장 규정이 간소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전 교직원들이 반바지를 입고 출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생각하곤 했다. 교직원 누구라도 반바지를 입게 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런 문화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에 뉴스로 광명시의 "반바지 시즌" 정책을 접하게 되었다. 광명시는 체감 온도를 낮춰 에너지를 절약하고, 유연한 업무 환경으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반바지 시즌"을 개최했다고 했다. 이 기간 동안 광명시 전 직원은 자율적으로 반바지, 치마 등 편안한 복장으로 근무가 가능했다. 광명시장이 앞장서 반바지를 입고 나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며, 보수적인 공직 단체도 변화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대기업에서는 이러한 '근무 복장 자율화' 문화가 예전부터 확산되는 거 같았다. 대기업 중에서는 일찍이 반바지 출근을 허용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2008년 복장 자율화를 시작한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반바지로 허용 범위를 넓혔다. LG전자(2018년)와 현대차그룹(2019년)도 자유로운 출근 복장을 허용하고 있었다.


 대기업까지는 아니지만, 광명시처럼만 한 번 해보자며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문을 클릭했다. 그런데, 아주 딱딱한 단어들에 의해 되려 된통 당하고 말았다. 공문에 쓰인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권장사항

○ 간소하고 단정한 복장 착용을 적극 권장

<간소하고 단정한 복장 예시>

 ‣상의 : 노타이 정장, 콤비, 니트, 남방, 칼라셔츠 등

 ‣하의 : 정장바지, 면바지 등


 ○ 넥타이는 계절에 관계없이 필요한 경우 외에는 착용하지 않도록 함

<넥타이 착용 필요한 경우 예시>

 ‣국회, 공청회 등 공식회의 또는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

 ‣국(내)외 손님 접견하는 경우

 ‣그 밖에 의전상 넥타이 착용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 등  


 협조사항

 ○ 지나치게 개성적인 복장 착용으로 공무원의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근무기강이 해이해진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

 - 특히, 민원담당 공무원 등의 경우 단정하지 못한 복장으로 민원인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례가 없도록 함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 예시>

‣지나친 개성 표출로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슬리퍼, 반바지, 찢어진 청바지 등의 복장     

 ‣과다하게 노출되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 등 



*글자색, 밑줄, 볼드는 작성자가 임의로 표시함. 



 기대했던 "복장 간소화"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간소한 복장은 안타깝게도 '정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 처럼 보였다. 협조 사항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민원인에게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복장을 잘 입어야 한다는 내용은 시대착오적인 문구였다. 2024년에 발송된 공문이 맞냐며 아래의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내용만으로는 2004년에 왔어야 할 공문이었다.


 이 글이 복장의 간소화가 아닌 '복장 규율 강화'를 의미했다고 확신한 이유는 반바지에 대한 문구가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 예시'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단정한 복장이란 무엇이며, '지나치게 개성적인 복장'이란 무엇일까.  


 TPO에 맞는 복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한다. T.P.O란 '의복을 경우에 알맞게 착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옷은 시간, 장소, 경우에 따라 착용하는 게 달라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교사에게 알맞은 T.P.O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단정한 복장은 무엇이며, 지나치게 개성적인 복장은 무엇인가.


 당연하게 내일 입을 나의 출근복 리스트에는 반바지는 없다. 세간에 떠도는 교직 사회에서의 이야기를 조합했을 때, 예전에는(라떼는) 청바지를 입을 수 없는 때도 있었다고 했기에 이에 그저 감사해야 했다. 청바지를 입은 날에는 따가운 시선을 받은 적이 있다는 선배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공문이 오늘 발송되었기 때문이다.


훗날에, "이상하게도 공직 사회에는 여름에 반바지를 안 입는 문화가 있었어." 하며 해프닝처럼 말하게 되는, 그런 날이 오긴 할까. 헛된 희망 같지만, 그래도 그런 문화가 생겼으면 하는 소망을 담으며 이 글을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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