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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병원 경험기: 아파 죽겠는데 다음 달에 오라고요?

병원 예약하려다 멘털 탈탈 털린 이야기

by Fresh off the Bae

한국에서 직장인이었던 나는 일 년에 한 번 건강검진을 받았다.


회사 앞 oo병원 아시죠? 거기 가셔서 접수하시고, 사전에 체크해 주셨던 항목에 대한 검사를 하시면 돼요. 여기 주의사항 읽어보시고, 아마 내시경 하시니까 금식하셔야 될 거예요.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잡아준 스케줄에 따라 매년 하는 건강검진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미국 직장인이 된 나. 문득, 건강 검진은 언제 받는지 궁금해졌다.


어머, 여기는 그런 거 안 해. 그냥 일 년에 한 번 피 검사하는 게 다야. 근데, 그것도 안 하는 사람이 많아.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럼 내가 어디가 안 좋은지 어떻게 알고 질병을 예방해?


물론, 미국의 건강 보험이 비싸고, 응급실이라도 한 번 갔다가는 엄청난 비용 폭탄을 맞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년 건강 검진을 하지 않는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얼마나 '한국식 마인드'였던 건지...


미국의 많은 회사들은 직원들에게 복지의 일환으로 건강 보험을 제공한다. 첫 직장에서의 내 보험은 HMO였는데, 쉽게 말하면 어떤 진료든 주치의(Primary Care Physician)를 먼저 거쳐야만 전문의에게 갈 수 있는 구조다.


일단, 너 원하는 주치의를 찾아야 돼.


엥? 주치의는 어떻게 찾는거지? 첫 관문부터 벽에 부딪혔다.


그 후에 소화기내과, 산부인과, 피부과 등등 스페셜리스트(전문의)를 봐야 하거나, 초음파나 CT 등 각종 검사를 할 때도 주치의의 리퍼럴(진료의뢰서)를 먼저 받고, 각 병원에 다시 전화해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아... 병원 가는 게 뭐가 이렇게 어려워?

Photo by Simran Sood on Unsplash


당시 나는 산부인과를 가야 했는데, 리퍼럴이 필요했으므로, 내 주치의가 될 수 있는 내과 의사나,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야 했다. 미국 보험에는 In-Network, Out-of-Network라는 개념이 있는데 내가 아무리 A라는 의사를 내 주치의로 하고 싶어도, 내 보험의 네트워크 밖이면(Out-of-Network)이면 진료비 대부분을 내가 내야 한다. 즉, 내 보험으로 일정 부분 커버가 되는 In-Network 의사 중에서 한국어 하는 의사를 찾아야 했다.


나는 곧장 보험사 웹사이트에 들어가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집 근처 In-Network 의사를 추려 구글에서 리뷰를 찾아보고 고심 끝에 한 의사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저희 새로운 환자 안 받아요.


차디찬 거절의 대답. 당황한 나는 구글 리뷰고 뭐고 일단 닥치는 대로 다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환자가 너무 많아 기존 환자만 보고, 새 환자를 안 받는 의사들이 생각보다 꽤 많았다. 결국 수차례의 전화 끝에 연결된 한 곳에서 새 환자를 받는다고 했다. 곧장 예약하겠다고 했더니 하는 말.


지금 가장 빠른 날짜는 다음 달 6일, 20일이고요, 아니면 그다음 달로 넘어가야 해요.


WHAT?!!!!




나는 결국, 한 달 넘게 기다려, 그것도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의 대기 끝에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피검사가 필요하지는 않았고, 단순히 산부인과를 가기 위한 주치의의 리퍼럴만 필요했는데, 주치의 병원에서는 무조건 첫 방문에 직접 의사를 만나야 리퍼럴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한다. 말 그대로 내 건강을 담당하는 주치의이지 않나. 필요한 검사를 하고 팔로업을 하고,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스페셜리스트 리퍼럴도 해주려면 나에 대한 의료 기록이 필요한 거겠지.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냥 산부인과만 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나... 내 보험이 HMO이고, 주치의의 리퍼럴이 필요한 것을...


그런 나를 더 화나게 한 건,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워크인 환자(예약 없이 찾아온 환자)들이 많아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내 주치의라는 사람은 나오지도 않고, NP(Nurse Practitioner 간호 진료 전문가로 한국에는 없는 의료 직군이다. 의사처럼 진단하고, 치료, 리퍼럴, 약 처방도 할 수 있다)가 나와서 이것저것 묻고 피검사를 하더니 리퍼럴을 써줬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내 주치의라는 사람의 뒷모습만 봤다.


그날, 나의 첫 미국 병원 경험은 매우 불쾌했다. 아니 그전부터 모든 과정에서 화가 났다. 아무래도 편하게 어디든 갈 수 있었던 한국 병원과 더 비교가 되어 그랬겠지.


그 이후, 리퍼럴을 받은 산부인과는 비교적 예약이 적었던지 일주일 내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12년 간 미국에 살면서 응급실을 가야 했던 일도, 수술을 해야 했던 경험도, 유산되는 과정에서 병원을 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렸던 일도 있었다. 이 모든 경험도 차차 기록해 보려고 한다.


미국에서의 나의 첫 병원은 불쾌한 경험으로 남았지만, 사실 병원을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약간의 해명이 필요한 건, 내 첫 주치의 병원이 유독 환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워크인 환자도 받았었기에 한 달 넘게 기다린 예약 방문임에도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건, 진짜 그 병원이 환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미국 병원이라면, 어딜 가나 어느 정도의 기다림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심지어 주치의를 만나지도 못했던 건... 그 병원이 유일했다.


또 처음 리퍼럴을 받은 후 스페셜리스트 방문은 일주일 내 이뤄졌었기에, 스페셜리스트는 예약이 덜 힘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스페셜리스트는 두 달은 넘게 기본으로 예약이 이미 꽉 찬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병원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고, 나에게 맞는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심지어 나는 초반에 특히 한국어가 가능한 한인 의사만 찾았기에, Pool 자체가 너무 적었다.


미국에선 농담 삼아 이렇게들 말한다.


아파서 병원을 가려고 했는데, 결국 다 나아서 간다고...


그러면 병원에선 다들 그렇게 얘기한다.


아파서 죽을 정도면 응급실을 가세요.




*상단의 커버 이미지: Photo by National Cancer Institut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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