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생존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1.5세인 남편을 인터뷰해 봤다. 그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인터뷰'라는 뭔가 공식적인 이름을 갖다 붙이니, 내가 뭐라도 된 마냥 신이 났다. 무엇보다 나름 남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각 잡고 시간을 일부러 비워내 그의 묵혀뒀던 기억을 파헤쳐봤더니 오아시스처럼 에피소드들이 콸콸 쏟아졌다.
몇 살 때 미국으로 왔어?
6살이었어. 학교를 미국에서 처음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한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어서,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어.
그런 것치곤 참 한국어 잘한다. ㅋㅋ 이민 가던 날 기억나는 게 있어?
그땐 워낙 어렸으니까, 어딜 가는지도 몰랐지. 비행기에서의 기억이 나의 첫 기억이야. 그냥... 뭐가 되게 다 신기했어. 다 처음 경험해 보는 거니까. 특히 음식이 너무 신기했던 것 같아.
기내식 말하는 거야? 뭐 어떤 거였는데?
전통적인 미국 음식이었어. 스크램블 에그, 슬라이스 햄, 매쉬드 포테이토, 수프, 빵... 이런 거 있잖아. 집에서는 계란을 항상 잘 익혀 먹었는데, 그날 나온 계란은 완전히 다 익히지 않아 뭔가가 좀 달랐지. 생긴 것도, 맛도. 그리고 빵은 항상 구워서 먹었는데, 디너롤이 나왔어. 디너롤 알지? 동그란 빵.
그걸 어떻게 구워 먹겠어. 근데 아버지가 그 디너롤을 반으로 잘라서 버터를 발라 드시는 거야.

너무 어려서 그 당시의 기억이 많이 없는데도, 비행기에서 있었던 그 순간들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어. 꽤 인상 깊었었나 봐...ㅋㅋㅋ
그때는 영어 전혀 못했을 거 아냐? 학교 간 첫 날 기억해?
영어 전혀 못했지. 가기 전 날, 부모님께서 간단한 말들을 가르쳐줬었어. 첫 번째가 "Can I go to the bathroom?", 두 번째가 "Can I go to the restroom?"이었어. 화장실은 가야 되니까. 그러고서 학교에 갔는데, 진짜 화장실을 가야겠는 거야. 그래서 손을 들고 말했지. "Can I go to the bathroom?" 근데 선생님이 못 알아들어. 그래서 다시 말했지. 이번엔 두 번째 버전, "Can I go to the restroom?" 근데 또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화장실은 가야겠는데 정말 너무 창피했어. 그러자 선생님이 옆에 있던 한국 여자 아이에게 통역을 부탁했어. 그 아이가 뭘 원하냐고 물어보길래, 쭈뼛쭈뼛 작은 목소리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HE WANTS TO GO TO THE BATHROOM!!" 하고 이 눈치 없는 여자애가 소리를 치는 거야.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어. 이런 일들이 초반에 자주 있었어.
와, 영어를 못하는 너는 참 상상이 안 간다.ㅋㅋ 꼭 겪어야 할 일이긴 했는데, 그 꼬맹이가 너무 안쓰럽네. 그럼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어떻게 했어?
아무리 어렸을 때 언어를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다고 하지만, 또래 친구들이 이미 많은 영어 단어들을 알고 문장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데 반해, 나는 영어에 백지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어. 학교에서는 ESL 수업을 들었고, 수업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말은 체크해 뒀다가, 집에 와서 복습하고 다시 연습했지. 또 부모님께서 책과 사전을 보면서 기본적인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셨어. 나도 당시 어린 나이였긴 했지만, 나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발동했던 것 같아. 그래서였는지, ESL 수업을 한 달 만에 끝내고 정규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어.
오... 대단한데? 사실 언어 말고도 문화적으로도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았을 것 같아.
당연하지. 이건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얘긴데, 그때 당시 초딩들 사이에서는 산리오 브랜드의 필통이 유행했었어. 한국에서는 자석으로 열고 닫는 필통을 많이 썼지? 지우개 넣는 부분 따로 있고, 연필깎이 칼도 있고 말이야. 나도 다 알지. ㅋㅋㅋ

산리오는 그냥 플라스틱 필통인데 개구리, 오리, 헬로 키티 등등 여러 가지 동물 캐릭터가 있었어. 무조건 동물 캐릭터가 있는 필통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 그때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가 개구리 캐릭터인 케로피(Kerropi) 필통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걸 보고는 '저거다! 내가 저걸 가지면 나도 인기 있는 아이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
사실 그때 나는 한국에서 사 온 커다란 변신 필통을 가지고 있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진짜 비싸고 좋은 필통을 사주셨던 것 같아. 근데 아무리 내 필통이 멋있든 비싼 거든, 상관없었어. 친구들에게는 처음 보는 이상한 필통일 뿐이었고, 그런 걸 들고 다니는 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FOB이었던 거지.
안 되겠다 싶었어.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나는 부모님께 그 플라스틱 필통을 사야겠노라고, 모든 아이들이 그 필통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 버젓이 멀쩡한 비싼 필통을 사줬는데, 갑자기 플라스틱 동물 캐릭터 필통이 필요하다니, 얼마나 당황하셨겠어. 근데 재밌는 건 뭔지 알아? 어머니가 내 마음을 다 이해하셨다는 거야. '아,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이게 유행이구나, 우리 아들 기를 죽일 수는 없지'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
어머니는 곧바로 밖에 나가서 필통을 사 오셨어. 그리고 나에게 자랑스럽게 새 필통을 내미셨지...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가진 개구리 캐릭터, 케로피 필통이 필요했는데, 심지어 오리도 아니었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돌고래를 사 오신 거야.ㅋㅋㅋ
사실, 내가 설명을 제대로 잘 못했겠지. 케로피라고 하면 어머니가 아셨겠냐고...ㅋㅋㅋ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해. 그때고 그 이후 사춘기 때고, 우리 부모님들은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나를 믿고 서포트해 주셨어. 심지어 본인들의 시선에는 이상할지언정, 그것이 아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화이고, 세대차이겠거니 하고, 잠자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주신 것 같아.
진짜 너무 대단하신 것 같아. 나 같으면, "너 엄마가 좋은 필통 사줬는데, 왜 또 사달라고 해?"라고 한마디라도 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필통 이야기로 끝날 줄 알았던 이 인터뷰는 생각보다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