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을 앞두고 아이에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곧 항암이 시작된다. 병원에서 머리카락이 빠질 거라고 했다.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이에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그 말을 하는 순간, 내가 아프다는 걸 무기로 쓸 것 같았다. 엄마 아프니까 엄마 말 잘 들으라고 했지!라고. 아이에게 그보다 잔인한 말이 있을까.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나는 무조건 나아서 아이 앞에 원래 모습으로, 아니 더 건강한 모습으로 설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는 지금, 내가 지독한 감기에 걸린 줄 알고 있다. 단, 머리가 걸렸다. 그것만 해결하면 가장 큰 산을 넘는 거라고 생각했다. 꽤 희망찼다. 그것만이 가장 큰 산이라니.
그나저나 아이에게 민머리를 뭐라고 설명하지. 사실은 스님이 되고 싶었다고 할까. 미용실에서 실수를 했다고 할까. 머리에 이가 생겼다고 할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 어설픈 연기를 하면 아이가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영리하니까 말이다.
"엄마, 도서관 가자. 나 저거 타고 갈래."
고민하다가 머리카락이 죄다 뽑힐 것만 같았다. 그래, 나가자. 아이는 며칠 전 새로 산 트리 바이시클을 가리키며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씁쓸했던 마음이 샤베트처럼 달콤해졌다. 답 없는 문제를 풀어야 할 때는 우선 나가는 게 답이다. 나는 말랑거리는 아이의 볼을 쭈욱 잡아당겨 뽀뽀를 했다. 아이의 맑고 팔딱거리는 기운 때문에 급속 충전이 되는 것 같았다.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갔다. 도토리를 줍는 것처럼 좋아하는 책을 꺼내 양 옆구리에 착착 꼈다. 소파에 앉아 손가락과 입을 작게 오물거리며 맛있게 읽고 벌떡 일어나 다시 책장을 향해 달려갔다. 작은 궁둥이가 책장 모서리를 휙 돌며 사라지자 고민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왔다. 뭐라고 말하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끈다.
"엄마, 저기 재밌는 책 엄청 많다. 같이 가자."
"쫑이가 읽고 싶은 책 빼와. 엄마가 읽어줄게. 아, 빌려가자. 집에 가서 실컷 보면 되잖아."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단 말이야! 바로 지~그 음!"
급속 충전된 에너지는 급속히 빠져나가기도 했다. 나는 포로처럼 아이의 손에 이끌려 갔다.
아이는 동물을 본떠 자동차를 설계했다는 그림책을 보여주다가 자동차가 툭툭 튀어나오는 팝업북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동물의 왕국에 자동차가 사이사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 아, 다 귀찮아,라는 말이 염불처럼 입에서 나오려던 찰나.
"엄마, 이거 읽어줘!"
아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읽어달라며 책 한 권을 내게 들이밀었다. 어린이 도서관이라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는 게 아쉬운 순간이었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어디 볼까, 하고 책을 펼쳤다.
「미용실에 간 사자 루까」
이왕 읽는 거 또 맛있게 읽어야지. 최대한 루까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읽어 내려가다가 유레카를 외쳤다. 순간, 강렬한 햇살이 창문을 통과해 들어왔고 눈이 부셨다.
"쫑아, 눈부시니까 저 방에 가서 읽을까?"
우리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루까에게 빙의된 것처럼 열심히 읽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지막 장을 덮고 아이에게 바짝 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쫑아. 엄마도 머리를 밀고 싶어."
조금 전까지 루까였던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아이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왜?' 하는 표정으로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할머니가, 엄마 아기 때 배냇머리를 안 깎아줬대. 쫑이 배냇머리 알지"
아이가 끄덕끄덕했다.
"그래서 엄마도 머리가 덥수룩하고 간지럽고 그런 거 같아. 루까처럼 밀면 엄마도 더 예쁜 머리카락 자라지 않겠어"
아이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래! 그래야 엄마도 여름에 시원하지. 머리가 꼬부라져서 북실거리면 루까처럼 여름에 엄청 더울 테니까."
아이가 양팔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마가 머리 밀면 아가 ㅆ다! 으하하하하. 빨리 깎아봐. 빨리! 귀여울 거 같아!"
나는 아이의 두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오래오래 볼에 입을 맞췄다.
"우리 이제 저거 타러 갈까?"
"응응!"
총총 뛰어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 눈에서 찰랑거리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이제 큰 산을 넘을 준비가 다 됐다.
「아직 슬퍼하긴 일러요」 중 한 꼭지를 소개합니다.
아이가 여섯 살, 남편은 해외 근무 중에 유방암을 진단받았습니다. 당시 제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었어요. 그게 벌써 십 년 전이군요. 너무 슬픈 이야기일 것 같다고요? 투병기이지만 소보로빵처럼 담백합니다. 뻑뻑하지 않을 만큼 촉촉하고요. :)
질병이 꾸준히 제공하던 기존의 사유를 새롭게 주시하고 싶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그동안 제가 '암'이라는 질병 안에 웅크려 지내던 모습이 보였어요. 세상과 나 사이에 교묘하게 나뉜 선도 보였고요. 보이지 않지만 박음질처럼 공고하고, 단단한 선이었어요. 아슬러는 그 박음질을 후드득 뜯어내는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몇 편을 미리 보여드릴게요. 아슬러(아직 슬퍼하긴 일러요)의 더 많은 이야기는 책으로 만나요!